<볼록거울> 이태영 여사와 법조 '女風시대'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09-08-13 14:55     조회 : 10042    

<볼록거울> 이태영 여사와 법조 '女風시대'
 
[연합뉴스 2007-01-18 08:37]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편집위원 = 광복 이듬해인 1946년, 한 가정주부가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이 대학에 여학생이 들어온 것은 나이 32살의 이 주부가 처음이었다.

그녀의 만학열정은 여러 모로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첫돌이 지나자마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교육열은 대단했다. 덕분에 그녀는 평양정의고등보통학교를 거쳐 22살 때 이화여전 가사과를 졸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삶은 이후에도 평탄하지 못했다. 대학 졸업 해에 결혼했으나 남편이 항일운동하다 투옥되는 바람에 옥바라지를 해야 했다. 혼자서 생계를 꾸리기 위해 삯바느질에 누비이불장수, 행상을 하기도 했다.

이런 그녀가 네 자녀를 키우는 가정주부의 몸으로 법대에 입학했으니 눈길이 쏠리는 건 당연하다 하겠다. 그 시대가 어느 때이던가. 조선시대에 극에 달한 남녀 불평등, 신분 차별의 인습이 상당히 강하게 남아 있던 시절이 아니던가. 무학의 여성이 태반이던 시대상에 비추어 최고학부를 꿈꾸고 그 꿈을 이뤄낸 그녀는 남성들에게 유별나게 보였을지 모른다.

짐작하다시피 화제의 주인공은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인 이태영 여사다. 금광으로 유명했던 평북 운산에서 태어난 이 여사는 버려지고 푸대접받으며 과거인습 속에 파묻혀 있던 여성이라는 '금맥'을 캐내는 데 일생을 바치다가 1998년 향년 84세로 타계했다.

법복 입은 여성을 상상하기도 힘들던 시대에 이 여사는 하나의 '혜성'이자 '반항아'였고 '모반자'였다. 남성 중심의 풍조에 브레이크를 걸고 양성 평등의 기치를 높이 치켜 세웠다. 하지만 그의 법조인생은 시작부터 장벽에 부딪혔다. 1952년 사법고시에 합격해 국내 첫 고등고시 여성 합격자라는 기록을 세웠으나 대통령의 반대로 판사로 임용되지 못하고 변호사의 길을 걸어야 했던 것이다.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내부의 반대세력에 대해 단호했다. 이는 야당에도 그대로 적용돼 국회의원 정일형 씨의 아내였던 이 여사는 한국 여성변호사 제1호라는 영예에 만족해야 했다. 이를테면 정치적 '희생자'였던 셈이랄까.

그러나 변호사의 길은 그를 더욱 존경받는 법조인으로 남게 했다. 여성변호사로 불우한 처지의 여성들을 만나면서 여성해방운동과 민주화운동, 인권운동에 이바지하게 된 것이다. 지난해로 창립 반세기를 맞았던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세운 주인공이 이 여사였고, 한국여성운동의 산실인 여성백인회관을 1976년 서울 여의도에 건립한 이도 바로 그였다. 1970년대에는 민주회복국민선언, 3.1민주구국선언 등에도 간여하는 등 민주화와 인권운동은 병상에 눕기 전까지 계속됐다.

가족법 개정과 호주제 폐지 등은 이 여사가 끈질기게 펼쳐온 여성운동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혼여성의 재산분할청구권을 인정하고 모계와 부계 혈족을 평등하게 8촌까지 확대하며, 철저히 남성 중심으로 이어져왔던 호주제를 철폐케 하는 데 그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는 얘기다. 동성동본의 금혼제가 사라지게 하는 데도 그는 중심에 섰다.

올해 사법연수원을 수료하는 연수생 가운데 판사와 검사로 임용되는 여성비율이 53.7%(전체 190명 중 102명)로 남성을 추월했다는 보도다. 특히 판사 임용이 예정된 여성은 전체 90명 중 58명으로 64.4%(여성검사는 44%)나 된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갖게 한다. 전체 사법연수생 975명 중 여성의 비율이 24.8%(242명)로, 비율이 가장 높았던 지난해의 20.8%를 크게 웃돌아 최근 여성의 사회진출이 눈부심을 알 수 있다.

새내기 여성 법조인들은 자신의 오늘이 있기까지 헌신한 선배들의 공로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시대정신 또한 깊이 명심해야 한다. 남녀문제에 그치지 않고 계층차원 등까지 사회정의의 시야를 두루 확대함으로써 주어진 소명에 폭넓게, 그리고 발전적으로 부응하는 법조인이 되기 바란다.

이 여사는 자서전 '나의 만남 나의 인생'에서 "평생 살아가는 동안 굽이굽이에서 만났던 수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이 자리까지 왔다"고 회고했다. 남녀평등과 인권신장, 민주화구현을 위해 살아온 그의 겸양이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있는 부부합장 묘비에는 '정일형 이태영 박사의 묘'라고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어 양성평등 시대의 도래를 다시한번 웅변해준다.

 

id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