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운명적 만남' DJ- 정일형 박사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09-08-26 16:46     조회 : 10911    

'죽어서도 운명적 만남' DJ- 정일형 박사 
생전의 정치적 스승... 두 사람 묘소 불과 20m 거리
 김당 (dangk) 기자
 
 
 
 
▲ 정일형-이태영 부부의 합장묘소 '정치적 제자'이자 '민주화 동지'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와 불과 20미터 거리에 있다. 
ⓒ 김당  김대중
 
 


23일 안장한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묘소는 고인의 유일한 '정치적 스승'이었던 고 정일형 박사-이태영 변호사 부부의 묘소와 불과 20미터 거리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음날 오후 봉분과 묘역에 잔디를 입히는 작업이 한창인 김 전 대통령 묘소를 찾아가 보니 국가유공자 제1묘역에 합장된 정일형-이태영 부부 묘소는 김 전 대통령 묘소로부터 동북쪽으로 불과 2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이날 아침 일찍부터 묘소에서 봉분작업을 지켜본 장성민 전 비서관은 "정 박사는 대통령님의 유일한 정치적 스승이었고 이태영 변호사 또한 영부인(이희호씨)과 각별한 사이였다"면서 "두 분이 돌아가셔서도 너무 지근거리에 있어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 운명적인 만남인 것 같다"고 말했다.

 

25일 김 전 대통령 삼우제를 마치고 부모의 묘소를 참배한 정대철 전 의원은 "그렇지 않아도 박지원 의원한테 대전(현충원)으로 가지 말고 이곳으로 모시라고 권유했었다"면서 "평생 뜻을 함께 한 네 분이 돌아가셔서도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게 될 것 같아 너무 기쁘다"고 소회를 밝혔다.

 

71년 대선, 후보와 선대위원장

 

 
 
▲ 김대중 전 대통령 삼우제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씨 등 유족들과 친지들이 25일 서울국립현충원 묘소에서 열린 삼우제에 참석해 헌화 및 분향을 하고 있다. 
ⓒ 김당  김대중
 
 


김 전 대통령과 정일형 박사의 운명적 만남은 70년 김 전 대통령이 제7대 대통령 선거전에 나섰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50대였던 박정희 대통령에 맞서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김영삼·김대중·이철승 후보의 3파전으로 진행된 경선에서 DJ는 극적인 역전승으로 승리했는데 그 뒤에는 현대 야당 정치사의 거목 정일형 박사가 있었다.

 

당시 신민당 지도부는 유진오 총재와 정일형·유진산 부총재, 그리고 김영삼 원내총무로 구성되었는데, 그중에서 정일형 부총재만 DJ와 같은 구민주당 신파 출신이었다. 그런데 20년 후배인 DJ가 대선에 출마하자 정 박사는 선거사무장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70년 9월 29일 당시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신민당 전당대회는 한국 정당 전당대회 사상 처음으로 애드벌룬을 띄우는 등 축제 분위기 속에 치러졌다. 대회장에 후보 포스터를 도배하듯 붙이고 지지자들이 피켓을 들고 환호하는 것이, 지금은 낯익은 풍경이지만 이는 70년 당시 처음으로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를 본뜬 것이었다. 당시 원내총무 자격으로 미국 전당대회를 참관한 사람은 김영삼 후보였으나 정작 이를 벤치마킹한 사람은 김대중 후보측이었다. 이희호씨는 그때의 뭉클했던 광경을 자서전 <동행>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다른 후보의 기세를 꺾는) 압도적인 분위기도 놀라웠지만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정일형 의원의 모습은 특히 감동적이었다. 남편이 존경하는 항일 투사이며 독재 청산의 선봉장인 정 의원은 지역구에서의 신임과 존경도 각별했다. 그래서 내리 5선의 경륜을 가진 분이 '김대중 동지를 대통령으로'라고 씌어 있는 피켓을 들고 호소하고 있는 장면은 당원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주었다. 모두 황송하고 고맙기 그지없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선대위원장 맡아 자택에 '고양이 방화' 화재

 

DJ가 신민당 대선후보로 선출되자 정 박사는 선대위원장으로 제7대 대선을 진두지휘했다. 이 때문에 그는 박정희 정권의 제2인자였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지휘한 정치공작의 제1표적이 되었다. 선거전이 한창 진행중인 71년 2월 5일 새벽에 일어난 이른바 '고양이 방화' 사건이 대표적 사례다.

 

정 박사 집에 원인 모를 화재가 일어나 아래채가 전소되고 정일형-이태영 부부의 장서와 많은 선거 자료들이 소실되었다. 특히 이 변호사가 20여 년 자료를 모아 집필한 <한국 여성운동사> 원고가 화재로 사라졌다. 당국이 밝힌 화재 원인은 고양이가 추워서 아궁이에서 불씨를 물고나와 불을 냈다는 것이었다. 이는 해외토픽으로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되었으며 그해 국내 10대 뉴스로 선정되는 등 조롱을 받았다.

 

중앙정보부의 집요한 선거방해와 정치공작도 문제였지만 당시 야당에서도 비주류였던 DJ는 계파경쟁에 휩싸인 당으로부터 선거자금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정 박사는 자서전 <오직 한 길로>에서 당시의 어려움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처음에 경제인들의 성금에 기대했다. 그러나 어떻게나 정보부의 압력이 심했던지 나와 절친한 경제인들까지도 면회조차 어려웠다. 김대중 후보나 나의 주변에 대한 탄압은 형언키 어려울 정도였다."

 

심지어 정 박사의 사돈인 한 기업인은 선거가 끝난 뒤에 선거빚을 다소나마 갚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DJ 집을 찾아갔다가 정보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당시 여당인 공화당은 600~700억원의 돈을 뿌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비해 DJ측은 법정 선거비 9억원의 절반도 쓰지 못했다고 한다.

 

이태영 변호사, 이대 법정대 학장 던지고 찬조연설

 

한국 여성운동의 태두인 이 변호사는 이화여대 법정대 학장직까지 던지고 김대중-이희호 부부를 도왔다. 이희호씨는 <동행>에서 "당시 선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역시 정일형 박사의 부인인 이태영 변호사다"고 기록했다.

 

"나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 그는 이화여대 법정대 학장직을 내던졌다. 입당해서 찬조연사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후덕해 보이는 좋은 인상과 청산유수 같은 언변을 지녔다. 게다가 소신과 정의감이 투철했다. 이태영은 일당백의 스타 연사였다. 그의 집은 선거를 앞두고 안방에서 사랑방까지 온통 선거 사무실이 되었다."

 

이태영 변호사는 나중에 DJ가 세 번의 실패 끝에 성공한 97년 대선에서도 찬조연설을 했다. 4반세기 넘게 김대중-이희호 부부의 고난에 '동행'한 것이다. 김대중-이희호 부부는 이런 두 사람을 '의인, 정일형과 이태영'으로 기렸다.

 

73년 8월 김대중 납치 사건이 터져 DJ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을 때 여당은 "김대중의 자작극이다"고 몰아붙였다. 그보다 더 기막힌 것은 한솥밥을 먹었던 야당이었다. 유진산 총재와 채문식 대변인조차도 김대중이 해외에서 호화생활을 하면서 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심지어 김일성의 연방제를 지지했다는 낭설을 퍼뜨렸다. 후일 전자는 '이중대'였음이 드러났고, 후자는 아예 여당으로 옮겨가 국회의장을 지냈다. 이들의 뒤에는 정보기관의 세뇌공작이 있었다.

 

정일형, 국회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 처음 거론해 곤욕

 

정보부가 언론의 보도 수위를 정하고, 국회의원의 발언조차도 조정하던 그 시절에 국회에서 유일하게 '김대중 사건'을 거론한 사람은 정일형 박사였다. 그해 9월 국회 본회의에서 외교안보에 관한 발언자로 나선 정 박사는 정일권 의장의 발언 중지와 여당 의원들의 소란 속에서 이 사건을 '정권의 피해망상증'으로 규정하며 김종필 총리를 상대로 이렇게 추궁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금 세계적인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김대중씨 사건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무엇 때문에 한 정권이 개인을 상대로 이토록 심한 피해망상증에 걸려 있는지 알 수가 없소! 사건 내용으로 보나 규모로 볼 때 아무나 범인이 될 수 없어. 외국에서는 물론이고 많은 국민이 이번 사건을 중앙정보부 소행이라고 단정하고 있어, 내 생각도 그런 것 같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생각 마시오."

 

야당의 최다선인 8선 의원 정일형이 국회에서 발언을 중지당한 것도 처음이었지만, 단상으로 뛰어오른 여당 의원들에게 떠밀려 넘어진 뒤 구둣발에 채이고 짓밟히는 폭력을 당한 것은 더더욱 처음이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장출혈이었다. 정일형-이태영 부부를 늘 '용기있는 의인'으로 존경한 김대중-이희호 부부는 이듬해 당시 공군 중위였던 장남 홍일의 결혼식 주례를 정 박사에게 부탁했다.

 

 
 
▲ '원조 촛불' 정치인 김대중 76년 3월 1일 암울했던 유신시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일형 박사(앞줄 오른쪽) 등과 함께 서울 명동에서 유신철폐를 위한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왼쪽이 김옥두 전 의원이고 김대중 뒤로 부인 이희호씨와 권노갑 전 의원이 보인다). 
ⓒ 김대중평화센터  김대중
 
 


 

혹독한 유신의 폭압 정치 속에서 돌파구는 재야와 손잡는 것뿐이었다. 당시 DJ와 정 박사 부부는 독재정권의 끝이 안보이는 암울한 현실에서 처음으로 재야인사들과 결합해 이른바 '3.1구국선언' 사건을 주도했다. 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운동 기념 기도회에서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긴급조치를 폐지하고 의회정치의 회복과 사법 독립을 이뤄야 한다"는 선언문을 읽고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든 것이다.

 

당시 이희호씨가 엄중한 감시를 뚫고 DJ의 원고를 필동의 오빠집에 갖다 두면 이태영 변호사가 이를 안국동 윤보선 전 대통령 집으로 전달했다. 암호명은 '한복'. 이씨의 큰올케가 "한복이 다 되었다"고 전화하면 원고를 찾아다가 문익환-안병무 교수가 수정하는 식이었다.

 

정일형의 최후진술

 

당시 검찰은 이 '원조 촛불' 사건을 '정부 전복 선동 사건'으로 규정했다. 이 사건으로 김대중·문익환 등 11명이 구속 기소되고, 윤보선·정일형 등 7명이 불구속 기소되었다. 김대중은 구속자 중에서 유일한 정치인이었고, 유일한 현역 의원이었던 정 박사는 의원직을 박탈당했고 이태영 변호사는 변호사 자격을 잃었다.

 

정 박사는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항일, 반공, 반독재 투쟁에 일생을 일관해왔다. 자유민주주의가 국시인 대한민국에서 민주회복을 주장했다 하여 재판을 받는다 함은 어불성설이다. 내가 항일투쟁할 때 일본군의 앞잡이는 누구이며 내가 반공대열에 섰을 때 여순반란 사건에 가담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내가 민주화운동을 할 때 독재자로 전락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가 말한 '누구'는 바로 박정희였다. 그해 5월 4일 첫 공판이 열리던 서소문 법원 앞. 이태영-이희호씨 등 피고인 가족들은 검정 테이프로 십자가 모양으로 만들어 입에 붙였다. 공개재판 하라는 항의의 표시였다. 그러나 재판 결과 김대중, 문익환, 윤보선, 함석헌 등이 각각 징역 5년을 선고받는 등 대부분 실형을 선고 받았다. 사건을 담당한 정치근 검사는 고속승진해 5공 때 검찰총장, 6공 때 법무장관을 지냈으며 담당 판사는 대법관이 되었다.

 

정 박사는 김대중 납치 사건을 처음 공개한 73년 9월 26일 발언 때 국회 본회의장에서 여당 의원들로부터 폭행을 당해 입은 장출혈로 생긴 자리가 나중에 암으로 발전해 결국 1982년 4월 타계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2007년 4월 제25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저는 개인적으로도 정일형 박사님의 막중한 사랑과 많은 은혜를 입었고 항상 저를 정치적 제자로서 지도해 주셨다"면서 생전의 일화를 밝혔다.

 

 
 
▲ 김대중 전 대통령 삼우제를 마친 정대철-김상현 전 의원이 정일형-이태영 박사 부부의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 김당  정일형
 
 


"제가 1971년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했을 때는 당에서 후보로 지명받도록 하기 위해서 시민회관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주시기도 하고, 후보로 지명되자 사무장을 맡아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정부기관이 정일형 박사님의 자택에 불을 질러 전소를 당한 일도 있습니다. 제가 1973년 일본에서 납치되었을 때는 국회에서 '정부가 한 뼘 손으로 태양을 가리듯이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고 규탄하기도 하셨습니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때는 현역 정치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참가하여 저와 같이 싸우시기도 했습니다."

 

생전의 DJ는 국립 서울현충원에 들렀을 때 "여보 우리는 나중에 여기에 함께 묻힙시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대중-이희호 부부도 평생 동안 정치적 스승과 제자이자 민주화 동지였뎐 정일형-이태영 부부와 지근거리에 묻힐 줄은 몰랐을 것이다. 실로 운명적 만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기자는 정일형-이태영 박사 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서 자료를 찾다가 김대중-정일형의 운명적 만남을 예고하는 사진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69년 8월 18일 제71차 임시국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삼선개헌에 반대하는 대정부질의를 하는 정일형 박사의 모습이다. 김 전 대통령이 타계한 날로부터 꼭 40년 전의 일이다.

 

 
 
▲ 운명적 만남의 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타계한 날로부터 꼭 40년 전인 69년 8월 18일 국회에서 삼선개헌에 반대하는 대정부질의를 하는 정일형 박사. 
ⓒ 정일형-이태영 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