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차별의 벽, 이태영 첫 여성판사 임명, 이승만이 제동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09-08-31 18:20     조회 : 11481    

여성 차별의 벽, 이태영 첫 여성판사 임명, 이승만이 제동
스포츠한국 원문 기사전송 2009-08-29 06:55

 

통계로 본 대한민국 60년
여성 경제활동 참여 : 1963년 37%→2007년 50%
외무고시 여성합격자 비율 : 2007년 67.7%

여성 차별의 벽, 이태영 첫 여성판사 임명, 이승만이 제동
"가당치 않다" 임명 무산… 변호사의 길로

광복 이듬해인 1946년 봄 서울대 법과 대학은 술렁거렸다. 개교 이래 첫 여학생이 입학했기 때문이다. 설렘도 잠시, 알고 보니 네 자녀를 둔 32세의 가정주부였다.

여학생과 함께 수업을 듣길 바랬던 법대생들이야 실망이 컸겠지만 그녀의 만학 열정은 사회적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이 여대생은 이후로도 이름 앞에 ‘최초’를 많이 달았다. 최초의 여성 사법시험 합격자, 최초의 여성 변호사였다.

바로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세운 여성운동가 고 이태영 박사의 이야기다.

이태영은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한 남편 고 정일형 전 외무부 장관의 뒷바라지로 청춘을 보냈다. 밤 새워 재봉틀을 돌리면서 혼자 생계를 꾸렸다. 그러다 광복을 맞았고, “이제는 당신 차례”라는 남편의 권유에 사법고시에 도전했다.

강인했던 그녀도 평생토록 지우지 못한 마음의 상처가 있었다. 바로 여성 차별이었다.

당시 판사 임명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은 김병로 대법원장이 요청한 판산 임용 후보 중 이태영을 제외시켰다. “여성은 아직 이르니 가당치 않다”는 게 이승만이 밝힌 거부 이유였다.

당시 법원과 검찰에서 함께 실무 수습을 하던 남자 동기생들은 모두 판사나 검사로 임용됐으나 그만 유독 대상에서 빠지는 바람에 그는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20대의 새파란 청년들이 모두 판사 임명을 받는 터에 38세나 된 네 아이의 엄마요, 세상 풍파를 다 겪은 첫 여자 고시 합격자에게 감히 어떻게 여자이기 때문에 시기상조라는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이 박사는 1952년 여성 최초의 사법고시에 합격하고도 판사가 되지 못한 설움을 이렇게 회고록에 썼다.

이태영은 나중에 법전 편찬위원장이 된 김병로를 찾아가 가족법 개정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그 때도 김병로는 “조그만 것이 법률 줄이나 배웠다고 벌써 꼬리를 휘젓고 다니느냐”고 호통을 쳤다.

훗날 이태영은 “눈에서 피눈물이 나오는 것 같았다”고 털어놨다. 1950년대에는 여성 차별의 벽이 그만큼 높았다.

70년대 입사때 "결혼하면 사직하겠다" 각서

1970년대까지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성이 대기업이나 은행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결혼하면 사직하겠다’, ‘30세에 그만둔다’는 내용의 각서를 써야 했다. 승진, 급여, 연수, 교육 등 모든 것을 남성에게 양보해야 했다.

남녀 차별은 국가기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체신부에서는 여성으로만 구성된 기능직 공무원의 정년을 40세로 묶어 공공연히 여성을 차별했다. 노동청은 대한간호협회가 추천한 해외파견 공무원 후보를 기혼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합격시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법적으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기회를 얻게 된 것은 1948년 대한민국을 건국하면서부터다. 그 해 ‘자주 독립 국가’의 국민으로서 여성도 ‘참정권’을 처음 인정 받았다. 그러나 이는 법조문에만 해당된 이야기일 뿐 이었다. 대다수 여성의 사회 활동은 제약됐고, 여성 차별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면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결국 의식 있는 젊은 여성의 관심은 자녀 교육으로 쏠렸다. 이것은 ‘부모 된 도리’라기보다도 자아 성취의 한 방법이었다.

1987년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되면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빠르게 개선됐다. 딸들은 이 때부터 어머니가 못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서서히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여풍(女風)의 물결도 거세졌다.

각종 국가고시의 수석은 여성의 독무대이고 취업 시장, 스포츠 분야까지 ‘여인천하’란 말이 나올 정도로 여성의 활약이 부쩍 늘었다. 남성이 독과점하다시피 했던 직업인 기관사와 토목 기사 중에도 여성을 찾기가 어렵지 않을 정도다.

2007년 한국남녀평등지수 128개국중 97위

2007년 주요 고시에서 여성 합격자 비율은 외무고시가 67.7%, 사법고시가 35.2%, 행정고시가 49%로 해마다 그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1980년 3.6%에 불과하던 전문 관리직 종사자 비율은 2007년 19.3%로 5배 가까이 불어났다.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도 활발해졌다. 여성의 경제 활동 참가율은 1963년 37%에서 2007년 50.1%로 높아졌다. 같은 기간 남성의 경제 활동 참가율이 78.4%에서 73.9%로 4.5% 포인트 떨어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같은 기간 여성의 고용률도 34.3%에서 48.9%.로 높아졌다.

학교에서도 여학생의 두각이 돋보인다. 남녀공학 중고등학교에서 전교 10등 안에 드는 남학생을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가 됐다. 오죽하면 ‘대한민국에서 아들 공부시키기’란 책이 인기를 끌고, 남녀를 구분해서 석차를 매겨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뎔?됐을까.

대학에서도 여성 총학생회장이 심심찮게 나오고 전국 대학 신문사 편집장의 3분의 2는 여성이 차지했다. 한국인 1호 우주인도 여성이다.

물론 아직 한국 여성이 성차별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다. 세계경제포럼(WEF)의 ‘2007 글로벌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남녀평등지수는 0.6409로 128개국 가운데 97위였다.

갈 길이 아직 멀었다는 이야기다. 다만 잠자던 여성이 깨어나기 시작한 만큼 성차별의 벽도 언젠가는 허물어질 것이다. 자료제공=한국통계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