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 70년] 정일형 박사 아들 정대철 前의원 (아래링크참조)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15-06-09 09:52     조회 : 5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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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A10면|기사입력 2015-04-14 20:02|최종수정 2015-04-14 22:3


[광복·분단 70년, 대한민국 다시 하나로] “민주주의·통일 위해 힘써 살아가라던 아버지 유언 생생”

새정치민주연합 정대철(71) 상임고문이 기억하는 광복은 부친인 정일형 박사와 춘원(春園) 이광수의 만남이었다. 정 고문이 다섯살이나 여섯살 때의 일이다. “춘원과 아버지가 상당히 친했다. 춘원이 아버지보다 10살이 많았는데 일제하에서 아버지에게 ‘현실을 수용하고 일본에 협조를 좀 해야 할 것 같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항상 ‘새벽 4시쯤 됐다. 동 트기 얼마 전이니까 우리가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해방 후 춘원이 우리집에 왔다. 1950년 북한에 납치되기 전이었다. 아버지가 말리는데도 춘원은 돗자리를 펴더니 큰절을 하고 ‘이제 내가 정 박사를 거꾸로 선생으로 모시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날 집에서 춘원을 본 기억이 남아 있다.” 지난 13일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정 고문을 만났다. 정 고문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로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부친에 대해 “아버지는 유언으로 ‘교회와 국민과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힘써 살아가세요’라고 말씀하셨다”고 소개를 대신했다.


―정 박사는 정치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아버지는 광성고보 2학년이던 1919년 만세운동을 하다 주동인물로 체포돼 훈계방면됐고 이듬해에는 독립신문을 배포하다 체포돼 고문을 받았다. 미국 유학 후 1938년부터 1945년까지 8년 동안 일제에 22번 체포됐고 5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창씨개명, 신사참배, 황민화 정책 반대 등의 이유였다. 조선총독부 정무국에서 미국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면 반드시 학살해야 하는 ‘요시찰 학살자 명단’을 만들었는데, 아버지와 김구 선생,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조만식, 조병옥, 정인보, 한용운 선생 등 132명이 포함됐다.”


―부친께서 파리에서 한국정부 승인을 얻었다.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 후 아버지는 이승만 대통령의 임명을 받고 조병옥 선생 등과 함께 파리 유엔총회에 파견됐다. 앞서 5·10 선거를 치러 정부를 수립한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독립국가로 승인받기 위해서다. 일본 도쿄에 가서 맥아더를, 중국 난징에 가서 장개석(장제스) 총통을 각각 만나 협조를 구했다. 장 총통이 ‘유엔총회에서 한국의 승인을 도와주겠는데 언젠가는 우리가 협조를 구할 일이 있으니 유념해두라’고 했다고 한다. 대만으로 도망가는 것을 상정해 그랬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필리핀, 미국, 캐나다를 거쳐 파리에 갔고 파리 총회에서 압도적 표로 국가 승인을 받았다. 파리 유엔총회에서 돌아온 아버지에게 이 대통령은 미국대사를 제안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한국에서 정치를 하고 싶다고 사양했다고 회고했다. 이 대통령이 그만큼 아버지를 신뢰했다.”


―부친은 이승만 대통령과 다른 길을 택했다.

“아버지는 1950년 6·25전쟁이 나고 부산으로 가서부터는 사실상 이 대통령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미군정에서 인사행정처장, 지금으로 치면 내무부장관을 맡았다. 아버지는 미군정이 들어설 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조병옥, 정인보, 장덕수 선생 등과 논의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아버지는 ‘미국통’이니 미군정과 독립 운동가들의 중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1950년부터 아버지와 조병옥, 장면, 신익희 선생 등이 이 대통령이 독재를 한다고 판단했고, 그때부터 이 대통령의 핍박이 시작됐다. 특히 인사행정처장을 맡았던 아버지는 이 대통령이 친일 인사들을 등용해 제1공화국 각료 96명 중 33명이 친일파라는 데 불만이 컸을 것이다. 초등학교 2, 3학년 때 아버지의 편지를 조병옥, 서민호 선생 집에 심부름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아버지께 물으니 ‘이 대통령에 반대하는 민주화 투쟁을 하자’는 내용이었다고 들었다. 그 당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병이 야당 의원을 체포하고 그랬다.”


―일본의 역사 왜곡이나 독도 도발 등이 이어지고 있다.

“단순히 교과서 왜곡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 침략을 ‘진출’로 바꾸려는 태도가 문제다. 반성은커녕 과거의 침략과 전쟁, 식민지화를 정당화하고 미화하려는 태도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정책은 과거 냉전체제에서는 공산권의 확장을 막기 위해 6·25전쟁 이후 일본을 거점으로 해서 도움을 받기 위해 일본 태도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일본이 과거를 잊고 기고만장해 중국과 한국을 대하는 것은 여기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미국이 최고 전범 책임자였던 일왕을 면제시켰다는 것도 잘못됐다고 생각된다. 최근에는 일본이 스스로 전쟁 피해자라고도 주장한다. 언어도단이다. 한·중·일 평화공존에 일본의 이런 태도가 결코 도움이 안 된다.”


―‘조용한 외교’를 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용하다는 것을 앞장세우면 안 하겠다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다. 김대중정부는 일본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미국과 일본에 저항하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특별한 차이는 없었다고 판단된다. 노 전 대통령은 ‘항의도 거칠게 하면서 또 합리적으로 대응하는 양면적 측면을 유지하자’고 해서 나도 그렇게 하자고 했었다. 무조건적인 감정적 대응보다는 과학적, 논리적, 실증적인 합리적 대응이 필요하다. 국제사회는 흥분하는 모습보다는 합리적이고 냉철한 측면을 높이 평가한다. 상호 역사 인식의 차이를 좁힐 수 있는 민간 차원의 교류 확대도 중요하다. 한일역사교사모임을 인상 깊게 봤다.”

―광복 70년을 맞는 소회는.

“조선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조선을 떠나기 전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놨다. 조선인들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 저주가 최근 되살아난 일본의 군국주의 광기와 맞닿아 있다. 그의 저주처럼 일제의 잔재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해방 70년 동안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이유가 크다. 해방 혼란기에 친일 부역자들이 우익으로 둔갑해 독립투사를 빨갱이로 매도해 처단했고 친일파들은 6·25전쟁을 거치면서 친미로 옷을 갈아입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 인사를 등용하고 미군정에서도 중요 행정직에 친일 인사를 심기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처럼 진상을 밝히고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는 등의 역할이 꾸준히 지속될 필요가 있다. 대신 우리는 아베 노부유키의 저주와 달리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85개국 중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한 나라다. 삼성전자의 1년 이익이 일본의 소니, 내쇼날, 샤프 등 유명 전자회사 10개를 합친 것보다 많게 됐다. 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성장한 것 등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박영준 기자 yjp@segye.com


■ 정일형 박사 가족은…

정일형(1904∼1982) 박사는 192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1935년 뉴저지주 드루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제강점기에 연희전문학교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1945년 광복 후에는 미군정청 인사행정처장과 물자행정처장을 지냈다. 1948년에는 유엔총회 한국대표단 고문을 맡았다. 신민당 부총재와 대표권한 대행을 지낸 정 박사는 1950년 서울 중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1977년까지 내리 8선 의원을 했다. 1976년 3월 유신정치에 반대하는 이른바 ‘3·1명동사건’에 연루돼 의원직을 상실했다.

정 박사의 부인 이태영(1914∼1998) 박사는 1946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 법학을 공부하고 여성 고등고시에 1호로 합격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변호사이자 여성 법조인이다. 이 박사는 가족법 개정운동을 주도했고 1970년대 중반 이후로는 여성권익신장운동에 주력했다. 이 박사도 3·1명동사건에 연루돼 실형을 받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정대철 상임고문은 부친인 정 박사가 국회의원직을 상실한 뒤 유신 말기인 1977년 첫 당선됐다. 이어 10, 13, 14, 16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민주당 최고위원·고문, 국민회의 부총재, 통합민주당 대표 등을 거쳤다. 정 고문 장남인 새정치연합 정호준 의원도 2012년 총선에서 서울시 중구에서 당선돼 3대가 국회의원으로 정치 가문의 맥을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