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 “김대중이 대통령 돼서 독재하면 제가 타도하겠다”(링크참조)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15-08-13 12:06     조회 : 8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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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7대 대선 때 신민당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은 정일형과 이태영 부부는 김대중·이희호의 가장 든든한 후견인이었다. 특히 선거 직전 이태영은 이화여대 법정대학장 자리까지 버리고 입당해 찬조 연사로 뛰었다. 사진은 4월18일 서울 장충단공원 유세 때로 정의감 넘치는 열변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사진 정대철 상임고문 제공

등록 :2015-08-09 15:16수정 :2015-08-09 15:20

길을 찾아서 / 이희호 평전
제2부 만남과 동행-(11회) 71년 대선
김대중이 말했다 “이번에 못 바꾸면 박정희 영구집권”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일생을 그리는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은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19번째 이야기다.

이 이사장이 걸어온 길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90여년에 걸쳐 있다. 이 일대기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해방 전후 대학 시절과 미국 유학, 사회운동 시절을 거쳐 정치인 김대중과 만난 뒤 현대사의 파란과 굴곡을 헤쳐 나오는 시기를 모두 아우를 예정이다. 그의 삶은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뜬 여성운동가의 삶이었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간난신고를 헤쳐 나온 종교인의 삶이었으며, 남편과 함께 불굴의 의지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의 삶이었다. 이 일대기는 매주 한번씩 진행하는 육성 인터뷰를 바탕으로 삼아 김대중평화센터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보관된 개인 문서와 구술 사료, 저서, 관련 책과 지인들의 증언을 참고해 집필한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경북 의성에서 유세를 시작했다
여당은 지역감정을 조장했지만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희호도 전국을 돌며 거들었다
“제 남편이 대통령 돼서 독재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

1971년 4월18일 장충단공원 유세
100만 군중에 김형욱은 질려버렸다
박정희는 “이번이 마지막” 호소했다
그 눈물이 가짜라는 걸 아는 데는
1년6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4월28일 새벽 개표도 끝나기 전
선거 참모들이 줄줄이 끌려갔다

 이희호와 김대중이 미국을 방문하고 있던 1971년 1월27일 동교동 집 마당에서 사제 폭발물이 터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이 120명이나 동원돼 집안을 샅샅이 수색하더니 김대중 쪽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연행했다. 경찰은 중학교 2학년생인 15살 김홍준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사건을 자작극으로 몰아갔다. 김대중의 조카 김홍준은 그때 동교동 집에 기거하고 있었다. 경찰은 소년을 잡아다가 자백을 강요하며 머리를 구정물통 속에 집어넣고 고문까지 했다. 이희호는 미국에서 그 소식을 듣고 치를 떨었다. “조카아이는 고문을 받고 장티푸스에 걸려 한때 사경을 헤매기도 했어요.” 경찰은 김홍준이 딱총 화약으로 폭발물을 만들어 터뜨렸다고 발표했다.

해괴한 일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동교동 폭발물 사건이 나고 여드레 뒤인 2월5일 새벽에 신민당 선거대책본부장 정일형의 서울 봉원동 집에 불이 나 아래채가 전소됐다. 이 사건으로 선거 관련 서류가 모두 불에 타 사라졌다. 경찰은 고양이가 추워서 아궁이 옆에 있던 솔가지를 잘못 옮겨놓는 바람이 불이 붙었다고 발표했다. ‘고양이 방화 사건’은 외신을 타고 세계로 퍼져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됐다. “고양이가 불을 냈다니 그걸 누가 믿을 수 있겠어요.”

김대중은 투표일을 한 달 앞둔 3월27일 경북 의성에서 공식 선거운동을 개시했다. 의성을 첫 유세지로 택한 것은 박정희의 지역분할 전략에 정면승부로 맞서겠다는 후보의 의지가 실린 것이었다. “여당이 지역감정을 조장했지만 제 기억에는 제대로 먹히지 않았어요. 부산이나 대구에서도 사람들이 정말 많이 모였거든요.” 김대중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대통령 후보가 도착하기 서너 시간 전에 유세장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부산에서는 50만명이 모였고, 대구에서도 19만명의 청중이 몰렸다. 농촌지역에서도 1만~2만명이 모이는 것은 보통이었다.

김대중은 몰려드는 사람들의 열기에 눈물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이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도 후회할 것이 없다는 심정으로 온 나라를 돌았다. “남편은 그때 초인적이라고 할 정도로 쉬지 않고 뛰었어요.” 김대중은 이른 아침부터 밤 10시까지 하루 열 차례가 넘는 연설을 했다. 그것도 매번 한 시간 가까운 연설이었다. 하루에 움직이는 거리가 400~800㎞에 이르렀다. 김대중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며 차 안에서 끼니를 때우고 눈을 붙였다. 지칠 줄 모르는 40대 후보에게 ‘철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희호도 남편에 뒤지지 않는 강행군을 계속했다. “남편이 1진이라면, 나는 2진이었어요. 남편이 가지 못한 곳을 주로 다녔지요.” 이희호는 영동·장호원·논산·서산을 비롯해 전국의 소도시 수십 곳을 돌았다. 장터와 거리를 다니며 거칠고 투박한 손들을 잡았다. 이희호는 연단에 오르기도 했다.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달라고 호소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제 남편이 대통령이 되어서 만약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 그 시절엔 후보 부인이 연단에 올라 연설을 하는 일이 드물었다. 사람들은 뜨거운 박수로 답했다. 빡빡한 유세 일정 때문에 이희호가 탄 차는 위험스럽게 질주했다. “통행금지 시간에 쫓기다 사고가 나지 않을까 걱정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타이어 바람이 빠져서 길가에 멈춰서기도 했고요.”

정일형의 부인 이태영도 찬조연사로 뛰었다. 투표를 2주 남기고 이태영은 이화여대 법정대학 학장직을 내던지고 신민당에 입당했다. “이태영 선생님은 부산 피란 시절부터 여성운동을 함께 했잖아요. 그래서 그분한테 도와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지요.” 이태영은 정의감 넘치는 열변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 박정희도 4월10일 대전에서 첫 유세를 시작했다. 유세와 유세의 대결만 보면 박정희는 김대중의 맞수가 되지 못했다. 박정희의 힘의 원천은 유세장의 청중이 아니라 수족처럼 움직이는 국가조직이었다. 중앙정보부는 공작기술을 총동원했다. 김대중의 선거운동원들도 음지의 손에 희생당했다. 중앙정보부의 표적 가운데 하나는 엄 창록이었다. 엄 창록은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 때부터 김대중을 도왔던 조직참모였다. 그 핵심 참모가 어느 날 사라졌다. 이희호는 엄 창록의 집을 찾아갔다. “엄 창록씨의 집은 우리 집에서 가까웠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아 집으로 찾아갔더니, 부인이 혼자 울고 있더라고요. 남편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대요. 누가 데리고 갔는데 며칠이 지나도 안 돌아온다는 거예요. 나중에 알았는데, 우리를 돕지 못하게 하려고 정보부가 잡아간 거였어요.”

공화당은 선거자금을 폭포수처럼 퍼부었다. 뒤에 박정희의 측근들이 밝힌 바로는 1971년 대통령선거에 쓴 돈이 600억~700억원에 이르렀다. 국가 예산의 10%가 넘는 거액이었다. “우리는 법정 선거비용 9억2000만원의 절반도 쓰지 못했어요.” 중앙정보부는 여당의 선거자금은 무제한으로 풀어대면서 야당의 선거자금원은 물샐틈없이 틀어막았다. 야당에 돈을 댈 만한 기업인들을 잡아들여 ‘선거자금을 절대로 주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고 풀어주었다.

“정일형 박사 셋째 딸의 시아버지가 심상준 제동산업 사장이었어요. 이분이 선거가 끝난 뒤 우리 집에 찾아와서 ‘지난 선거 때 도움을 못 주어서 미안하다’면서 ‘선거 빚을 다소나마 갚아드리겠다’고 했어요.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다렸지요. 그런데 그 뒤로 아무 소식이 없어서 섭섭했어요. 뒤에 들으니 정보부에 끌려가서 곤욕을 치렀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얼마나 미안했는지 몰라요.” 선거가 끝났으니 별일 없겠지 하고 동교동을 찾았다가 집 주위 감시망에 걸려든 것이었다.

서민들의 손때 묻은 돈이 가뭄의 단비 구실을 해주었다. 정일형은 그때의 일을 회고록에 기록했다. “본부장실에 지게꾼 차림의 남루한 행색을 한 어떤 분이 찾아왔다. 나의 손을 붙잡고 얼마나 수고가 많으냐면서 구겨진 돈을 내 손에 쥐여주고 달아나듯 바삐 돌아섰다. 나는 그 사람이 쥐여준 돈을 들여다보았다. 2500원이었다. 한동안 넋을 잃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희호도 비슷한 일을 선거기간에 겪었다. 한번은 전남 광주에서 찬조유세를 마치고 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웬 남자가 차창을 두드렸다. “테러 위험이 있을 때였기 때문에 창문을 잘 열지 않는데 눈빛이 하도 간절해서 차창을 조심스럽게 내렸더니, 그분이 봉투를 꺼내어 차 안으로 밀어 넣었어요. 행색이 남루했는데 집 팔아 받은 돈에서 전세금을 뺀 거라면서 꼭 독재를 막아 달라고 해요. 나중에 보니 100만원이 들어 있었어요.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는데 그 후로 다시 보지 못했어요.”

간첩 사건도 어김없이 다시 등장했다. 보안사령관 김재규가 지휘하는 육군보안사령부는 투표일이 열흘도 남지 않은 4월20일 ‘재일동포 학원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보안사는 ‘선거를 틈타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려고 암약해 왔다’며 재일동포 대학생 서승·서준식 형제를 비롯해 10명을 입건했다. 보안사는 서승이 김대중 후보 비서실장 김상현의 집에 열 달 동안 하숙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두 형제를 혹독하게 고문했다. 김대중과의 관계를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서승은 더 고문을 당하면 무슨 말을 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난로의 기름을 끼얹고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서승의 얼굴은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선거 막판에 지역감정 조작이 기승을 부렸다. 경상도 전역의 후보 벽보 ‘2번 김대중’ 밑에 ‘호남인이여, 뭉쳐라’ ‘호남 후보에게 몰표를 주자’ 같은 선동 문구가 붙었다. 영남 유권자를 자극하려는 흑색선전이었다. 국회의장 이효상은 “경상도 정권을 세우지 않으면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고 선동했다. 대구시민은 대통령 선거 직후 치른 총선에서 이효상을 떨어뜨리고 야당 후보를 당선시켰다. 이희호의 말대로 그 시절엔 지역감정 위력이 세지 않았고 대구시민도 정권의 조작에 휘둘리기만 하지는 않았다.

제7대 대통령 선거의 가장 놀라운 사건은 4월18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김대중의 유세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렸던지 김대중이 연단까지 진입하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희호는 남편과 함께 연단으로 가는 도중에 인파에 싸여 머리가 흐트러지기도 했다.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어요.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걸을 수가 없었지요.” 그날 모인 사람들은 줄잡아 100만명에 이르렀다. 정부의 집요한 방해 공작을 뚫고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그날 정부는 공무원과 공공단체 직원들에게 가족 동반으로 모두 야유회에 참가하도록 했다. 향토예비군 비상소집령도 내렸다. 기업들은 일요 특근으로 노동자를 일터에 묶어놓았다.

이날 모인 인파가 얼마나 압도적인 장관이었는지는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이 회고록에서 한 말로 짐작할 수 있다. 김형욱은 이날 집회에 직접 참가해 현장의 열기를 느꼈다. 건국 이래 최대의 인파였다. “나는 김대중 유세에 운집한 인파가 내뿜는 분위기에 숨이 막힐 만큼 질려버렸다. 민중은 분명히 김대중 편이었다. 김대중은 신익희나 조병옥 같은 과거의 야당 지도자들이 보여주었던 국민적 지도자상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일주일 뒤인 4월25일 박정희가 같은 장소에서 유세를 했다. 누구의 청중이 많은지를 놓고 말들이 많았다. 김형욱의 회고다. “신문·방송들은 박정희가 김대중보다 훨씬 더 많은 청중을 동원했다고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심지어 <동아일보>조차 박정희 후보가 33만명, 김대중 후보는 30만여명을 동원했다는 식으로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게 보도했다. 두 유세 현장을 직접 목격한 나는 청중의 양과 질에서 김대중이 단연 박정희를 앞섰다고 판단했다.” 김대중의 청중은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던 데 반해 박정희는 공무원조직과 통·반 행정조직을 부려 동원한 사람들이었다.

<뉴욕 타임스>는 김대중의 유세에 모인 청중을 90만명이라고 보도했다. 김대중은 유례없는 대군중을 앞에 두고 사자후를 토했다. “여러분! 이번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앞으로 선거도 없는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옵니다.” 김대중은 몸속의 힘을 모두 끄집어내 외쳤다. “오는 4월27일 이 나라 5000년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손에 의해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위대한 민주주의 혁명을 이루자는 것을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100만 군중은 장충단공원 일대가 떠나갈 듯 박수와 함성을 보냈다. 박정희는 일주일 뒤 김대중의 연설을 반박했다. “야당 후보가 말하는 총통제는 근거가 없습니다. 이번이 마지막 입후보이며 더는 국민들에게 표를 달라고 부탁하지 않겠습니다.” 박정희는 눈물까지 흘렸다. 그 눈물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국민이 아는 데는 1년6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4월27일 제7대 대통령선거는 보이지 않는 손들의 광란이었다. 투개표 과정에서 헤아릴 수 없는 부정이 저질러졌다. 선거인 등록 때부터 야당 성향 주민을 무더기로 명부에서 빠뜨리고 여당을 지지하는 주민은 이중 삼중으로 등록시켰다. 중앙정보부가 트럭 3대분이나 되는 부정선거 용지를 인쇄해서 사용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이희호·김대중 부부가 투표한 동교동의 투표구에서는 2700표가 모두 무효로 처리되었다. 신민당 총재 유진산이 살고 있는 상도동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박정희 634만표, 김대중 539만표, 95만표 차이로 박정희가 승리했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 발표였다.

영남 유권자들의 시민정신도 박정희가 그 지역에서 표를 멋대로 주무르는 것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박정희는 경상도에서만 150만표를 앞선 것으로 발표됐다. 대놓고 저지른 투개표 부정의 결과였다. 대구의 공무원들은 박정희 이름 아래 기표가 된 투표용지를 받았다. 여당이 도둑질한 표가 적게 잡아도 200만표가 넘을 것이라는 것은 선거 상황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일이었다.

김대중이 패배한 것으로 보도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의 눈물을 흘렸다. 이희호는 분을 삭이기 어려웠다. 김대중이 개표에서 이긴 것으로 나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희호는 박정희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남편을 몇 번이나 죽이려고 했는데 순순히 물러났겠어요? 절대로 그대로 두지 않았을 거예요.” 김대중 쪽 사람들에 대한 정권의 탄압은 개표가 완료되기도 전에 시작됐다. 4월28일 새벽 비서실장 김상현과 공보담당 김경재를 비롯해 선거를 도왔던 사람들이 육군보안사령부 특별취조본부로 줄줄이 끌려갔다. 인터뷰 녹취정리/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