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V 당신이 대한민국의 주인공입니다. 이태영박사님인터뷰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15-09-01 14:46     조회 : 6451    

KTV 인터뷰
- 프로그램명 : KTV 당신이 대한민국의 주인공입니다.
- 가제 : 대한민국을 빛낸 1호 여장부
- 촬영 일시 : 8월 27일 오후 1시 30분 (@회관)
- 방송일시 : 9월 7일 (월) 오후 7시 30분-8시 (30분간) - 18회


Q 1. 이태영 변호사님은 광복 전 ‘최초의 여성 변호사 1호’라는 수식어가 붙는데요. 이태영 변호사님은 어떤 분으로 기억하시나요?

▶ 사실 제가 어렸을 적에는 할머니이신 이태영 박사님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목소리 크시고 호탕한 제 친 할머니일 뿐이었습니다. 다만 할머니는 저에게 ‘대한민국에서 가장 똑똑한 여자’였습니다. 할머니 집과 사무실에는 항상 두툼한 책과 원고가 쌓여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와 이야기하기 위해 방문했었습니다. ‘할머니가 책을 많이 읽어 똑똑하시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오나보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좀 자라고 나서야 할머니가 한국 현대사에 많은 기록을 남긴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가장 할머니가 자랑스러웠을 때는 우리나라의 오만원권 화폐를 제작할 때 ‘신사임당, 유관순과 함께 할머니께서 후보에 오른 것이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전근대사적 인물이기 때문에 아직 역사적 평가가 더 남아있다는 이유로 오만원권 도안후보에서 제외되긴 했지만, 그 후보군에 속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하고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Q 2. 이태영 변호사님의 당시 활약상을 말씀해주세요?

▶ 할머니께서는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지만, ‘야당 정치인의 아내’라는 이유로 당시 이승만대통령에 의해 판사임용이 거부되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판사대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되었고, 동성동본 및 가족법을 바꾸려고 많은 노력을 하셨습니다.

할머니께선 가족법 개정 없이는 사회제도적·문화적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점을 일찌감치 통찰하셨습니다. 그래서 지프차를 타고 전국을 돌며 이동상담소를 운영하기도 했고, 많은 여성단체들과 함께 가족법 개정운동에 앞장서셨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1960년에 제1차 개정, 1977년에 제2차 개정, 1989년에 제 3차 개정을 이루셨습니다.

때로는 거리 데모와 행진을 하셨는데, 가족법 개정 반대자들과 남성들이 할머니께 폭언과 행패를 퍼부었습니다. 남성 우월주의 속에서 남자가 바람을 피워도 잘못은 여자에게 있고, 남녀가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지도 못하던 사회적으로 여성이 존중받지 못한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할머니께선 미동도 않으시고, 더욱 목청을 높이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황소’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습니다. 


 
Q 3. 이태영 변호사님께서 활약하던 당시 대한민국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 할머니께선 ‘한국의 첫 여성 법조인’으로 40여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힘없는 여성들의 인권과 고난 받는 이들의 변론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그 40년은 한국이 근대사회로 진입하는 과정과 동일한 시대였습니다. 유교적 봉건주의 시대의 몰락에서 시작하여, 일제의 침략으로 우리 민족이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했던 식민시대, 그리고 해방과 전쟁, 분단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곧바로 급격한 산업화와 자본주의적 경제구조를 근간으로 하여 세워진 독재체제와 이에 항거하며 폭발했던 민주화의 열망까지, 할머니에게 주어진 시대적 고난과 아픔은 대단히 거대했습니다.

특히 당시는 많은 여성들이 가정문제나, 사회인습 때문에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호소할 곳 초차 없었습니다. 또한 무엇 때문에 그렇게 당해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인권과 복지란 용어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때입니다. 게다가 남녀차별의 가장 상징적 법제인 가족법은 관습존중, 미풍양속이라는 대명사 아래 그대로 여성들을 묶어 꿈틀거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런 대한민국의 상황으로 할머니의 삶을 구분하자면,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요, 우선 평범한 여성으로 살았던 해방 이전과, 한국의 첫 여성법조인으로서 여성운동가의 삶을 살았던 해방 이후로 나누어집니다.

해방 이전의 삶은 다시 결혼 이전과 이후로 구분됩니다. 결혼 전에는 시대를 앞서가는 신여성의 모습이었지만, 결혼 이후에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남편 정일형 박사를 대신하여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던 어머니였습니다.

여성법조인으로 살았던 해방 이후의 삶도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가정법률상담소를 세우고 가족법개정운동을 이끌며 여성운동에 몰두해왔던 시기와, 유신헌법이 선포되기 직전인 1971년을 계기로 인권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적극 뛰어들어 사셨던 시기로 구분됩니다.

이처럼 할머니께서는 ‘여성운동가’로만 머무르신 게 아니고, 불의한 힘과 권력이 지배하는 시대에 맞서 저항하고, 법의 정의를 지켜내기 위해 평생을 헌신하셨습니다.



Q 4. 이태영 변호사님은 한국가정법률 상담소를 세우고 여성에 대한 불평등과 인습에 맞서 싸운 여성운동가이기도 한데요. 이태영 변호사님이 이룬 성과가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 할머니께선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세우고, ‘가족법 개정’을 가장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법률상담이 아픈 여성 76만 명에게 준 작은 지팡이라면, 가족법 개정은 우리 국민 반수가 든든하게 기댈 기둥이 될 것이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2005년도에 헌법재판소가 발표한 ‘호주제 폐지 선언’을 할머니께서 못보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호주제’는 가부장제와 남녀차별의 대들보였는데 폐지된 것입니다. 할머니께서 가족법 개정운동을 시작 한지 반세기 만에, 국가에서 아들과 딸, 그리고 남녀의 가치와 역할이 천부적으로 같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할머니께선 가정법률상담소가 주축이 된 여성단체협의회의 진정으로 1963년에 설치된 ‘가정법원’의 설치를 보람된 일로 뽑으셨습니다. 1995년에 가정법원이 서울뿐 아니라 각 도시에 고루 설치하는 것이 남은 숙제라고 인터뷰하신 적이 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 서울을 포함하여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등에 가정법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Q 5. 이태영 변호사님의 활약당시 에피소드, 비하인드 스토리 또는 사람들이 몰랐던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 일명 ‘고양이 화재 사건’으로 불렸던 의문의 화재가 있었습니다. 이 화재는 할아버님이신 정일형 박사님이 김대중 후보와 함께 대통령선거에 몰두하던 어느 날 발생했습니다. 삽시간에 퍼진 불길은 서재 안에 있던 소중한 자료들을 모두 태워버렸습니다. 며칠 후 이 사건을 조사한 경찰은 화재 원인이 고양이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고양이가 밤에 추우니까 아궁이 옆에 쭈그리고 있다가 아궁이 뚜껑 위에 솔가지를 옮겨 화재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이 화재로 근 20년간 모아온 ‘한국여성운동사’관련 자료들이 불타버린 것을 굉장히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이 원고들은 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할 때부터 개화기 이후 한국여성들이 걸어온 역사를 정리하여 이론적으로 정립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자료를 수집해온 것이었습니다. 서론과 결론을 제외한 모든 원고가 완성되어 있었고, 분량만해도 색인카드로 1천 6백장이 넘었으며, 수백 명을 인터뷰한 원고는 50cm 두께에 이르렀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할머니께선 김대중 대통령후보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거를 적극 돕기로 결단하고 나섰습니다.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정권을 되찾기 전까지 그 어떤 인권도 제대로 보장받을 수 없다는 절박함과 저항의지가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전국의 주요 도시를 뛰어 다니며 대통령 선거 지원유세에 나섰는데요, 연단에 선 할머니의 첫 마디는, “고양이가 불 낸 집 마누라입니다” 였습니다. 이에 청중들이 박수를 치며 폭소로 화답했다고 합니다. 할머니의 센스가 엿보이는 연설이었습니다. 

비록 선거에 실패하고 그 이듬해인 1972년엔 유신이 선포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할머니께선 법의 정의와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반독재투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며 재야 민주인사로 그리고 인권변호사로 그 활동 범위를 넓혀갔습니다.



Q 6. 마지막으로 이태영 변호사님과 관련해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할머니께선 ‘귀중하게 태어난 인간은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해야 하고, 법 자체가 인간을 차별할 때 그것은 개정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억울하고 약한 이웃의 편에 서서 일하셨습니다. 무료상담, 변론, 대서, 소송대행, 전국적 법률구조사업의 확대를 위한 국내외의 지부 설치, 의식개혁을 위한 교육사업, 법제도적 개정운동에 이르기까지 전 생애를 바치셨습니다.

제 할머니이시지만, 제가 참 존경하는 분입니다. 또 닮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회적 약자를 위한 그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힘쓰고 있는데요,
요새 청년들이 실업과 주거마련, 결혼 등 인생을 포기하게 될 정도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있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올해 ‘새정치민주연합 청년위원장’에 도전했고, 선택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 할머니의 ‘황소’같이 밀어붙이는 뚝심을 보고 선택해 주신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전심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평균 연령이 58세입니다. 그만큼 의사결정구조가 노후화됐다는 뜻이고, 청년문제를 소홀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올해 4월에 청년위원장 선거를 하면서 청년을 위한 정책을 선도해나가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당대표와 혁신위원장 등을 차례로 만나 청년을 위한 예산확보와 정책개발에 힘을 써야한다 강조했습니다. 아직 예산반영이 되지 않았지만, 꼭 관철시킬 것입니다.

할머니께선 “가난하고 억울하고 불행한 이웃들의 편에 서서 이들의 인권옹호에 필요한 모든 법률적 구조사업 및 인권 회복‘을 위해 가정법률상담소를 설립하셨습니다. 저 또한 제 조부모님이신 정일형·이태영박사님의 뜻을 이어나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홀로 살고 계신 어르신들을 위한 노인복지법 발의라던지, 아이들 보호를 위한 아동복지법, 그리고 차별을 막기 위한 국가인권위원회법까지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앞으로도 차별과 소외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기 위해 정책과 입법을 통해 적극적으로 앞장서 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