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2월 말 3김 회동…민주화 낙관한 YS·DJ, “봄은 우리에게 왔다”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15-09-09 10:42     조회 : 4561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8622086&cl… (1552)

1980년 2월 25일 김종필(JP) 민주공화당 총재가 동아일보 김상만 회장 주최로 서울 계동 인촌기념관에서 열린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 추도 행사에 참석했다. 왼쪽부터 이태영 변호사, 정일권 공화당 고문, 김대중 전 의원, 김상만 회장, 김영삼 신민당 총재, JP, 모윤숙 시인. 언론은 이날 회동이 “대선 주자들의 정치향연”이라며 비상한 관심을 보였으나 계엄사령부가 복권이 되지 않은 김대중씨에 대해 보도 통제를 하는 바람에 3김 사진은 신문에 실리지 못했다. 김대중씨는 기사에서도 “곧 복권될 재야인사”로 표현됐다. JP는 이때 정국을 “봄이 왔으나 진짜 봄이 온 건 아니다”고 말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보좌역 동훈]



1980년대를 여는 새해가 밝았다. 사회는 겉으로는 안정을 되찾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정치권은 정치의 해빙기를 맞아 한껏 들뜬 분위기였다. 한쪽에서는 ‘민주화의 여명’이 밝아온다고 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안개 정국’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나는 신년을 맞아 휘호를 썼다. 流水不爭先(유수부쟁선). 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는다는 뜻이다. 과욕을 부리며 앞을 다투기보다는 순리(順理)에 따라 세상사를 처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권력의 향방이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던 때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누구에게나 집권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정치권에선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물밑 다툼이 시작되고 있었다.

김영삼(YS) 총재는 자신이 10·26을 촉발시킨 장본인이라며 마치 승리자가 된 듯 앞장서 갔다. 79년 말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김대중(DJ) 역시 재야를 기반으로 세를 키워나갔다. 과도기의 심판을 맡겠다던 최규하 대통령도 신현확 총리가 옆에서 군불을 때자 초심과 멀어져 갔다. 12·12 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의 신군부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총재로서 주저앉은 민주공화당을 일으켜 세우기에 바빴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뒤 공화당은 난파선 신세였다. 최규하 과도 정부가 들어서자 공화당은 더 이상 집권 여당이 아닌 원내 다수당일 뿐이었다. 63년 창당 이후 공화당이 이룩한 근대화의 공적은 인정받지 못하는 대신 유신 독재의 도구라는 비난을 받기 일쑤였다. 그런 공격에 제대로 반박하지도 못하고 죄인이 된 것처럼 주눅이 들어 있었다. ‘요즘 공화당은 사기가 죽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다’는 조롱마저 내 귀에 들려왔다. 나는 조직을 다독이면서 차근차근 추슬러 나가야 했다. 나는 신년사에서 “새 시대에 맞춰 당이 새 옷을 입고 새 마음으로 새 길을 열어야 합니다. 가슴을 활짝 열어 온 국민의 소리를 제대로 듣고 정도(正道)를 단단히 열어가면서 다시금 국민의 신임을 호소하고자 합니다”고 말했다.


 80년 2월 25일 서울 계동 인촌기념관에서 김상만 동아일보 회장이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 추도 행사에 정치권 인사들을 초대했다. 나와 김영삼 신민당 총재, 사면 복권을 앞둔 김대중까지 3김(金)이 한자리에 모였다.

 아직 신군부의 야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때다. 시중에는 ‘서울의 봄’이 오고 있다는 막연한 낙관론이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3김이 함께 참석한 이 행사에 언론의 집중적인 플래시가 터졌다. 신문·방송은 81년 대선의 유력한 주자들이 모두 참석한 정치 향연이라고 보도했다. 정일권 공화당 고문, 이태영 변호사, 모윤숙 시인, 글라이스틴 미국대사, 스노베 일본대사, 버니 캐나다 대사도 참석했다. 만찬장에서 서로 인사를 나눈 뒤 TV 카메라맨들의 요청으로 나는 YS·DJ와 나란히 서서 건배하며 포즈를 취했다. 내가 “잔을 마주쳤으면 마십시다”고 하자 한 참석자가 “무엇을 다짐하는 잔입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우리나라의 참되고 민주적인 역사를 만들자는 다짐입니다”고 말했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미국대사는 우리를 보며 ‘스리 라이언(three lions)의 만남’이라고 이 장면을 표현했다.

 기자들을 앞에 두고 3김이 돌아가며 이야기를 했다. 말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은 YS였고, 그 다음이 DJ였다. 두 사람은 말끝마다 “봄은 우리에게 왔다” “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표현을 썼다. 박 대통령의 서거로 민주주의에 봄이 왔을 뿐 아니라 자신들에게도 봄이 왔다는 뜻이었다. 양 김 모두 ‘다음 대통령은 나’라는 전제에서 하는 말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정권이 자기들 호주머니에 이미 들어와 있다고 믿고 있는 듯했다.


  나는 기자들 앞에서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양 김씨가 나를 쳐다봤다. “봄이 온 것 같지만 진짜 봄이 아니란 뜻입니다. 아직도 춥지 않습니까. 봄이 오기도 전에 옷을 벗으면 감기에 걸리고 폐렴이 돼 죽을 수 있습니다. 지금 봄이 왔다고들 하는데 생각지 않은 일이 벌어질 거란 예감이 듭니다.” ‘각자 대권이 자기 눈앞에 왔다고 떠드는데 그건 허튼소리’라는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하지만 나의 경고성 발언은 그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통령 자리를 바로 앞에 두고 있다는 어리석은 착각 때문일 것이다. 내가 전두환의 신군부가 어느 정도 준비가 돼 있었는지 정확히 간파하고 그런 말을 했던 것은 아니다. 박 대통령 시절 군부엔 일절 접근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신군부 세력이 꾸미는 무지막지한 일을 정밀하게 파악할 순 없었다. 다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불온한 세력이라는 감(感)을 갖고 있었다. 좋지 않은 예감은 적중하는 법이다.

 이날 나는 만찬 중에 붓펜으로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이라고 글씨를 썼다. 외국 대사들이 그 뜻을 묻기에 “잘못이 이치를 이기지 못하고 옳은 이치라도 법에 우선할 수 없으며 법도 권세를 능가하지 못하고 그 권세라고 할지라도 필경에는 하늘, 즉 민의를 이기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모임은 권력이 아닌 국민의 뜻을 쫒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내일을 위한 새 출발을 시작해야 했다.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든지와 상관없이 나는 나대로 새 시대의 정치를 해보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었다. 80년 2월 27일 관훈클럽 초청토론회에 나는 ‘새 역사의 고동’이란 제목으로 기조연설을 했다. 연설문에 대망의 80년대 나의 모든 꿈과 비전을 담았다. 새 역사의 고동이 맥박 치고 있으니 새 시대로 나아가자는 취지였다. 내 생각을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몇 날 며칠 독해를 하고 심혈을 기울여 연설문을 정리했다.

 연설의 앞머리에 유신의 공과(功過)에 대한 평가를 담았다. 가장 고심했던 부분이었다. 나는 과거를 부정하진 않았지만 반성을 내놨다. “유신 체제는 70년대 밀려든 국내외로부터 엄청난 도전을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유신 체제를 운용하는 과정에서 목적과 효율을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민주적 절차를 희생함으로써 정치가 무력화되고 각종 사회 갈등과 부조리가 누적된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이어 80년대에 이뤄야 할 과제를 제시했다. 새 시대의 최우선 과제는 민주화였다. 70년대까지는 경제 발전과 국가 안보라는 목표가 민주화에 앞섰지만 이제는 우선순위가 바뀔 때가 된 것이다. “우리는 민주화의 과제를 용기 있게 추진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경제 발전에 상응하는 민주화를 과감히 추진하는 것만이 국민적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해 정치의 안정과 새로운 경제 발전의 추진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지사회를 뜻하는 인간화와 글로벌 시대를 대비한 국제화도 강조했다. “우리 경제의 구조와 체질을 개선해 산업과 산업, 도시와 농촌, 그리고 계층과 계층 간의 격차를 꾸준히 해소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보다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외교를 전개해 동북아 질서의 형성에는 물론 국제 질서의 형성에도 보다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80년 내가 제시한 민주화, 인간화(복지), 국제화 즉 세계화는 전두환 세력의 무도한 권력 찬탈이 없었으면 아마도 10년 이상 그 성취를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다. 이날 관훈토론회에서는 신문사 편집국장과 논설위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언론의 관심사였던 개헌과 정치 일정에 대한 질문이 많았다. 나는 “서두른 나머지 잘못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우린 절대로 붕괴된 와우아파트와 같은 잘못된 일들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고 답했다. 또 “3선 개헌과 유신 때 박정희 대통령의 결정에 따랐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타협을 할 겁니까”라는 질문도 나왔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른이 하시겠다는 일에 이바지할 수 있다면 내 철학과 소신과 다르지만 따라가겠다는 것이 지난날의 철학이었습니다. 이제 그 어른이 돌아가셨습니다. 나름대로 내 철학, 내 소신이 있습니다. 나는 공당인 민주공화당의 총재입니다. 내 소신을 펼쳐나갈 것이고 내 철학을 굳건하게 지켜나갈 것입니다.”

 김영희 중앙일보 부국장은 “정치권외(政治圈外)에서 부는 바람이 예상되는 게 없습니까”라고 송곳 질문을 했다. 12·12와 전두환 소장의 신군부를 둘러싼 소문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나는 신중하게 답했다. “지금 항간에 돌고 있는 이야기들은 기우(杞憂)라고 생각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옳게 하면 기우가 현실화되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사실 나의 이 대답은 기우라는 확신을 가지고 한 것이기보다는 기우였으면 하는 희망과 기우에 그쳐야 한다는 당위가 반영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 기우가 사실로 드러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인물 소사전  글라이스틴(William H. Gleysteen Jr·1926~2002)=유신 말기 박정희·카터 정권의 한·미 외교갈등 때 주한 미국대사를 지냈다. 1978~81년 한국에 재직하는 동안 10·26 박정희 시해, 12·12사태, 5·17 신군부 권력장악 등 한국 현대사의 격동 속에 있었다. 당시 대사로서 본국에 보낸 보고서를 토대로 신군부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제한적이었다는 요지의 회고록 『알려지지 않은 역사(Marginal influence)』를 펴냈다. 51년부터 외교관 생활을 했으며 한국대사가 마지막 공직이었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