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정 요원이 방 하나 차지…전화 와도 “잔다” “없다” 끊어버려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15-09-21 10:50     조회 : 477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 (1665)

1973년 8월13일 밤 김대중이 도쿄 실종 5일 만에 동교동 집에 나타난 소식은 ‘긴급 뉴스’로 알려져 세상을 또 한번 발칵 뒤집었다. 사진은 김대중(맨 오른쪽)·이희호(왼쪽 둘째)의 평생 후원자였던 정일형(맨 왼쪽) 박사가 부인 이태영 변호사와 함께 가장 먼저 동교동으로 달려와 생환의 기쁨을 나누는 모습이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남편이 들어오고 10분이나 지났을까 내외신 기자들이 집으로 들이닥쳤어요.” 동교동 집 주위의 동네 사람들도 몰려들었다. <동아방송> 긴급 뉴스를 듣고 온 사람들이었다. 김대중이 풀려난 직후 언론사마다 전화벨이 울렸다. 애국청년구국대원이라고 주장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위협하듯 말했다. “김대중은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데리고 왔다. 김대중같이 외국에 가서 경거망동하는 놈은 앞으로도 가만두지 않겠다.” 이희호의 집은 순식간에 50명도 넘는 기자들로 가득 찼다.

“남편은 밤 11시쯤부터 새벽까지 기자회견을 했어요.” 김대중은 납치와 생환 과정을 이야기했다. 납치범들의 마취가 듣지 않아 김대중은 정신이 몽롱한 중에도 납치 행로를 상세하게 기억했다. 나중에 현장검증을 해보니 김대중의 기억은 거의 오차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예수님에게 살려달라고 기도하던 대목을 이야기하던 중에 남편은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았어요.”

큰아들 홍일은 늦게 집에 돌아와 아버지를 보고 큰절을 했다. “내 손을 잡자마자 아버님께서는 흐느끼며 우셨다. 곁에 계시던 어머니도 함께 우셨다.” 장교로 복무하던 둘째아들 홍업은 아버지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근무지를 뛰쳐나왔다. 특별휴가를 신청해도 받아주지 않아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라디오 뉴스에서 아버지 육성이 나오자 무작정 부대를 이탈한 것이었다.

김대중이 생환한 다음날인 8월14일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은 ‘이번 사건과 중앙정보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발표했다. 그러더니 사태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15일 마포경찰서장이 와서 가족과 가사도우미와 운전기사만 남기고 모두 집에서 나가라고 명령했다. 동교동 집으로 통하는 골목마다 바리케이드를 세워 외부의 출입을 막았다. “형제들도 비서들도 들어올 수 없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인 홍걸이가 등하교할 때마다 경찰이 따라붙었어요.”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날 오후부터 경찰과 중앙정보부 요원이 방 하나를 차지하고서 세 사람이 교대하며 집을 지켰다. “안방의 전화선도 끊어버리고 하나 남은 전화통을 경찰이 독점하고는 전화가 오면 ‘잔다’, ‘없다’ 하며 바꿔주지 않았어요.” 수사 방향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담당 검사, 경찰서장, 정보부원이 남편을 조사하는데 납치 경위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국외 활동을 캐물었어요. 마치 죄인 다루듯이 심문했어요.” 8월24일 일본 <요미우리신문>이 서울발로 ‘김대중 납치사건, 정보부 기관원 관련’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국가기관이 사건에 관여돼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힌 보도였다. 정부는 <요미우리신문> 서울지국을 폐쇄하고 기자 3명을 추방했다. 진실이 알려지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몸부림이었다.

김대중이 사선을 넘어 살아 돌아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것은 미국이었다. 주한미국대사 필립 하비브는 신속하고도 적극적으로 사건에 개입했다. 김대중 납치·실종 사실이 주한미국대사관에 보고된 것은 납치 후 두 시간이 채 안 된 8월8일 오후 3시였다.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이 가장 먼저 납치 사실을 알아내 대사관으로 연락했다. 도쿄의 납치공작 현장본부와 서울의 중앙정보부 본부 사이의 연락이 미국 정보망에 걸려들었음이 분명했다. 납치됐다는 정보를 접수한 하비브는 즉각 한국에 있는 모든 정보팀을 소집했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중앙정보국 한국 책임자 도널드 그레그도 달려왔다.

그레그는 뒷날 펴낸 회고록에서 이 순간을 묘사했다. “하비브는 격분했다. 그는 김대중이 도쿄의 호텔에서 납치됐으며, 지금 그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됐는지 생사 여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하비브는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을 납치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사태를 파악한 하비브는 박정희에게 긴급 메시지를 보내 ‘김대중 납치 사실을 알고 있으며 김대중이 죽는다면 미국과 한국의 관계가 끝장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하비브 대사가 그렇게 빨리 손을 쓰지 않았다면 남편은 돌아오지 못했을 거예요. 물론 나는 그때는 미국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요.”

미국 정부에 김대중 납치 사실을 알린 사람 중에는 한민통 미국본부 핵심 인물인 임창영도 있었다. 임창영은 장면 정부의 고위 관리를 지내다 5·16 쿠데타 뒤 망명한 사람이었다. 임창영은 한민통 미국본부 대표로 일본에 와 있다가 김대중 납치 사실을 안 직후 워싱턴의 한국문제 전문가 그레고리 헨더슨에게 연락했다. 헨더슨은 하버드대학 교수 제롬 코언에게 전화로 사실을 알렸고, 코언은 다시 대통령 특별보좌관 헨리 키신저에게 전화했다. 키신저는 모든 조직을 가동해 진상을 파악하도록 지시했다.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 도널드 레너드는 납치 뒤 11시간 만에 미국이 김대중의 안전에 중대한 관심이 있다는 강경한 내용의 성명을 발표해 서울과 도쿄로 전달했다. “우리는 남편이 용금호에서 수장당하기 직전에 나타난 비행기가 미국이 보낸 것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뒷날 그레그씨가 미국 비행기는 아니었던 것으로 안다고 정정해 주었지요. 미국이 압력을 가하자 한국 정부가 일본 쪽에 공작선의 위치를 알려주고, 일본 비행기가 출동했던 것 같아요.”

김대중과 함께 활동하던 재일한국인 민주화운동가들도 긴박하게 움직였다. 배동호·김재화·정재준·김종충·곽동의·조활준은 납치 발생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저지른 짓이 분명하다고 발표했다. 이 기자회견은 분초를 다투던 때에 김대중 구명 여론을 일으켰고 박정희 정권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일본 경찰은 초기 수사에서 누가 납치를 실행했는지에 관한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냈다. 먼저 납치 현장인 그랜드 팰리스 호텔 2210호실 욕조에서 채취한 지문 중 하나가 주일한국대사관 일등서기관 김동운의 것임을 밝혀냈다. 이 지문은 한국 중앙정보부가 범행에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사건이 나기 이틀 전 오후 그랜드 팰리스 호텔 인근 등산용품 상점에서 김동운이 큰 배낭을 사갔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1998년 2월에 공개된 ‘케이티(KT) 공작요원 실태조사보고’라는 중앙정보부의 극비문서는 이 사건이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지휘 아래 모두 46명이 9개조로 나뉘어 조직적으로 저지른 것이었음을 알려주었다.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은 1976년 6월22일 미국 하원 프레이저 위원회 청문회에서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을 납치했음을 자신이 수집한 정보로 확인하였다고 증언했다. 김형욱은 납치에 관여한 사람 목록을 프레이저 위원회에 제출했는데, 프레이저 위원회는 그 목록이 “미국 국무부의 정보와 일치하므로 믿을 수 있다”고 발표했다. 김형욱은 부장 이후락, 차장 김치열, 차장보 이철희를 명시하고 제1책임자로 주일한국대사관 공사 김기완(김재권)을 지목한 뒤 납치를 실행한 일곱 사람의 이름을 밝혔다.

사람들의 관심은 납치 살해를 지시한 최고책임자가 누구인지에 쏠렸다.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모임’은 1995년 펴낸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에서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적 타격을 줄 수 있는 이런 엄청난 일을 대통령 박정희가 모르는 사이에 중앙정보부가 단독으로 계획하고 실행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희호도 박정희가 직접 개입했을 것으로 확신했다. “이후락 부장이 뒤에 최영근 의원한테 박정희 대통령이 납치 살해를 직접 지시했다고 얘기한 적이 있거든요. 대통령의 지시 없이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이 벌어질 수 있겠어요.”

이후락은 1980년 ‘서울의 봄’ 시기에 동향 친구인 최영근에게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1973년 봄 박정희 대통령이 나를 불러 김대중을 죽이라고 지시하였다. 나는 곤혹스러운 나머지 실행을 미루고 있었는데 박 대통령이 다시 명령을 내렸다. 김대중씨를 납치한 사람도 나지만 살려준 사람도 나다.” 그 후 이후락은 <신동아> 1987년 10월호 인터뷰에서 최영근에게 그렇게 말한 바 없다고 말을 바꾸었다. “이후락 부장이 최영근 의원한테 한 말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남편도 그렇게 생각했고요. 그러니까 사건의 정확한 명칭은 김대중 납치사건이 아니라 김대중 살해미수 사건이지요.”

김형욱도 프레이저 위원회에 나와 “이만큼 중차대한 계획이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 없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형욱은 이 청문회에서 박정희가 김대중을 살해하려 한 이유도 밝혔다. “박 대통령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는 1971년 그와 대결하였던 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씨와 미국의 대한정책을 좌우하는 미국 국회입니다. (…) 김대중씨에 대한 박정희씨의 감정은 단순한 정적 관계가 아니라 깊은 열등의식을 바탕으로 한 증오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승자는 패자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민주정치상 최소한의 예절마저도 무시하고 (…) 백주에 남의 나라 수도에서 그를 납치하여 투옥시키는 비양심적, 반민주적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납치사건에 중앙정보부가 직접 관여한 것이 분명한데도 여당에서는 납치사건을 ‘김대중의 자작극’으로 몰아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신문들은 그런 주장을 크게 보도했어요. 심지어는 유진산 총재가 이끄는 신민당 안에서조차 ‘자작극’이라는 여당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사건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고 나선 사람이 신민당 의원 정일형이었다. “납치사건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탄압을 각오해야 하는 때였는데 정일형 박사가 이 문제를 국회에서 이야기했어요.”

정일형은 9월26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무총리 김종필에게 질의했다. 정일형의 질의가 김대중 납치사건에 관해 핵심을 찌르는 대목에 이르자 여당 의원들이 책상을 치고 소리를 질러댔다. “무엇 때문에 한 정권이 개인을 상대로 하여 이토록 심한 피해망상증에 걸려 있는지 알 수가 없소! 여보, 김 총리! 일본의 수도 동경에서 백주에 김대중씨를 납치해 서울 한복판에 데려다놓은 범인들이 바로 한국 사람이야! 외국에서는 물론이고 많은 국민들이 이번 사건을 중앙정보부 소행이라고 단정하고 있어!” 정일형의 발언은 열네 번이나 중단되었고 끝내 원고를 다 읽지 못했다. “정일형 박사가 여당 의원들한테 떠밀려서 넘어지고 구둣발에 차였어요. 그때 장출혈이 생겼는데, 그 자리가 나중에 암으로 악화해서 결국 1982년 세상을 떠나셨어요.”

9월5일 일본은 납치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범행 현장에서 김동운의 지문이 발견되었다고 밝히고 당사자의 출두를 요구했다. 한국대사관이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자 한-일 관계가 얼어붙었다. 일본은 자기 나라에서 납치 범죄를 저지른 것은 주권침해이므로 공식 사과하고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 뒤 한국과 일본이 합의한 해결방식은 진상규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국 정부는 김동운을 비롯해 사건 관련자들을 모두 귀국시켰다. 11월2일 국무총리 김종필이 박정희의 사과가 담긴 친서를 들고 일본으로 가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를 만났다. 이것으로 진상규명 작업은 흐지부지되었다. 그 뒤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 레너드는 한국 정부가 다나카에게 3억엔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고 미국 의회에서 증언하기도 했다. 김대중 생환 직후 설치한 특별수사본부는 1년 뒤인 1974년 8월14일 내사 중지 결정을 하고 그 이듬해 내사 종결을 한 뒤 사건을 묻어버렸다.

“그러는 동안 남편은 계속 연금 상태에 놓여 있었어요. 10월 중순에는 이용택 중앙정보부 6국장이 찾아와서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라고 했어요. 남편도 집에 갇혀 있느니 미국에서 활동하는 것이 낫겠다고 보고 미국으로 가겠다고 했지요. 그래서 짐을 싸놓고 기다리는데 소식이 없었어요.” 11월에 하버드대학 교수 에드윈 라이샤워가 김대중을 하버드대학으로 초청하는 서류를 들고 서울에 왔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그날 하루 연금이 풀려 김포공항에 나가 라이샤워를 마중했다.

“라이샤워 교수와 외무부 차관이 만나 우리의 미국행을 협의하기로 했는데 약속한 시간에 차관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이후에도 연금은 풀리지 않았다. 이듬해 6월1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출두명령을 냈다. 1967년 윤보선 대통령 후보 지원유세를 하던 중 선거법을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미국행을 막으려고 7년도 더 된 문제를 갑자기 꺼내든 것이었어요. 납치 문제가 커질까봐 일본 정부가 남편의 미국행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해요. 우리 정부도 그렇게 판단했던 거고요.” 박정희 정권은 결국 김대중을 집 안에 가두어두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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