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소원 ‘가족법 통과’ 국회 방청석에서 지켜봤죠”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16-06-08 14:47     조회 : 11643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46947.html (1637)

1989년 12월19일 정기국회 마지막 날 이희호(점선 표시)는 방청석에서 이태영(맨 오른쪽)·이우정 등 여성단체 대표와 평민당 의원 부인들과 함께 가족법 개정안 통과 순간을 지켜봤다. <한겨레> 자료사진

등록 :2016-06-05 20:43

1989년 12월 이희호에게 뜻밖의 기쁨을 주는 일이 벌어졌다. 가족법 개정이었다. “가족법 개정은 내 평생소원이었어요. 헌법은 남녀평등을 보장하고 있는데 가족법은 일제강점기에 틀이 만들어진 뒤로 거의 바뀌지 않았거든요. 내가 창설에 앞장섰던 여성문제연구소가 가족제도에 관한 민법 개정을 추진하고, 그 뒤에는 이태영 박사가 가정법률상담소를 이끌면서 여성단체들과 함께 개정 운동을 벌였어요. 그래서 1960년, 1977년 두 차례 손질했는데 여전히 남녀차별 조항이 많았어요. 여성들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들, 손자에게까지 법률상 종속돼 있었지요.”

1989년 12월 정기국회 마지막날
여야 대표 합의로 가족법 개정
의원 부인들 축하오찬 연 김대중
“고맙다는 한마디 못들었다” 푸념

90년 1월22일 ‘3당 합당’ 전격 발표
노태우·김영삼·김종필 ‘동상이몽’
“군사정권 손잡은 김영삼에 남편 충격”
보수대연합 거대여당 ‘민주화 역류’

90년 10월 김대중 ‘무기한 단식’ 돌입
3여당 지방자치제 연기 시도에 ‘제동’
“곁에서 보리차 끓여주는 것밖에…”




1990년 10월 김대중은 3당 합당 이전에 합의된 `지방자치제 실시’ 이행을 내걸고 13일간 단식투쟁을 벌여 관철시켰다. 평민당사 단식 8일째 이상증세를 보인 김대중을 이희호·김홍일 등 가족과 측근들이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기고 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90년 10월 김대중은 3당 합당 이전에 합의된 `지방자치제 실시’ 이행을 내걸고 13일간 단식투쟁을 벌여 관철시켰다. 평민당사 단식 8일째 이상증세를 보인 김대중을 이희호·김홍일 등 가족과 측근들이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기고 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가족법 개정은 가부장제의 뼈대인 호주제·친권제, 남녀 상속 차별, 친족 범위의 남녀차별, 동성동본 혼인 금지, 이혼 배우자 재산분할권이 주요 쟁점이었다. “1989년에 상황이 아주 좋아졌어요. 각 당에서 순번제로 법사위원회의 소위원회 위원장을 맡는데, 평화민주당이 그해 맡게 됐어요. 또 여성계 대표로 평민당 의원이 된 박영숙 부총재가 보건복지위원회 소속이었어요.” 당시 법사위 소위원장은 평민당 의원 홍영기였다. 그런데 법사위 소위원장이 회의를 소집하지 않아요. 여야 가릴 것 없이 남자 의원들이 가족법 개정을 바라지 않았어요. 어느 날 박영숙 부총재가 나한테 전화를 했어요. 위원장이 회의 소집을 안 한다고 도와 달라고요. 나는 다른 정치 문제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지만, 가족법 개정 문제만큼은 내 생각을 남편에게 전했지요. 남편도 여성 권리 신장에 관심이 많아서 내 의견을 그대로 들어주었어요.”
김대중은 홍영기와 이야기했다. “소위원장을 다른 분에게 맡기면 어떻겠습니까?” “아이고, 제발 그래주십시오. 저는 정말 그 일이 싫습니다.” 김대중은 총재 비서실장인 조승형에게 소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저도 가족법 개정에 반대하지만 총재님의 뜻이니 맡겠습니다.” 김대중은 여야 영수회담 때마다 가족법 개정을 촉구했다. 1989년 12월15일 김대중은 대통령 노태우와 여야 대표가 만난 5자회담에서 ‘제5공화국 비리’ 청산을 매듭짓는 조건으로 가족법 개정과 지방자치제 부활을 요구했다. 노태우가 한번 검토해보자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제1야당 총재와 대통령이 찬성하자 가족법 개정 움직임이 빨라졌다. 정기국회 마지막날인 12월19일 가족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1990년 7월 크라이스키 오스트리아 전 총리 장례식에 김대중 대신 참석한 이희호는 둘째 아들 김홍업과 독일에 들러 무너진 베를린 장벽에서 남북통일 기원 악수를 나누며 기념촬영을 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90년 7월 크라이스키 오스트리아 전 총리 장례식에 김대중 대신 참석한 이희호는 둘째 아들 김홍업과 독일에 들러 무너진 베를린 장벽에서 남북통일 기원 악수를 나누며 기념촬영을 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통과하기 직전까지도 곡절이 많았어요. 여당 의원들이 완강하게 반대하는 거예요. 박준규 민정당 대표가 호주제와 동성동본 금혼 규정을 일단 빼고 가면 어떻겠냐고 박영숙 의원한테 제안을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대요. 그런데도 여당이 말을 안 들으니까 남편이 직접 노태우 대통령한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지키라고 따졌어요. 그래서 대통령이 여당 간부들에게 가족법 개정안에 협조하라고 지시해 가까스로 통과했지요. 국회의원 부인들과 함께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될 때 방청했어요. 다들 손뼉을 치고 좋아했지요.”
김대중은 가족법 개정안이 가결되자 원내총무 김영배에게 말했다. “김 총무, 역사적인 법안이 통과됐는데 다른 당은 몰라도 우리 당 의원들은 박수 한 번 칩시다.” “남자 권리 다 빼앗겼는데 뭐가 좋아서 박수 치느냐고 그럽니다.” 의원석을 돌고 온 김영배의 대답이었다. “가족법 개정안이 통과된 뒤에 남편이 방청한 의원 부인들을 초대해 여의도에서 축하 점심을 샀어요. 남편이 그 자리에서 한마디 했지요. 여성들을 위해 그동안 많은 일을 했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했다고요.” 가족법 개정은 이희호의 살림에도 도움을 주었다. “남양주에 선산이 있었는데 그 땅이 수용돼 고속도로가 났어요. 그때 친정 조카가 나에게도 보상금 중 일부를 나누어주었어요.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상속을 받을 수 있게 된 거지요.” 1989년 가족법 개정안에서 빠졌던 호주제는 2005년 3월 국회에서 폐지 법안이 통과됐다. 동성동본 금혼 규정도 1997년 7월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뒤 2005년 폐지돼 역사의 유물이 됐다.



1990년 2월9일 제1야당 평민당과 김대중을 고립시킨 ‘3당 합당’의 주역들이 민주자유당 창당 축하연에서 건배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태준·김영삼·노태우·김종필. <한겨레> 자료사진

1990년 2월9일 제1야당 평민당과 김대중을 고립시킨 ‘3당 합당’의 주역들이 민주자유당 창당 축하연에서 건배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태준·김영삼·노태우·김종필. <한겨레> 자료사진


1988년 활동을 시작한 국회의 5공특위와 광주특위는 1989년 12월31일 전두환의 국회 증언으로 막을 내렸다. 전두환은 이날 새벽 백담사에서 나와 오전 10시 국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청문회는 14시간이나 진행됐지만 전두환은 광주학살 발포 문제를 놓고 ‘자위권 행사였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흥분한 평민당 의원들의 항의와 민정당 의원들의 맞대응으로 청문회는 일곱 차례나 중단됐다.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 간부였던 정상용은 “사람을 죽여놓고 자위권이냐”고 소리쳤다. 이철용은 증인석으로 뛰쳐나가 전두환에게 “당신은 살인마야”라고 외쳤다.
전두환이 퇴장하자 노무현은 자기 명패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뒤에 펴낸 책에서 노무현은 통일민주당 지도부에 화가 나 명패를 던졌다고 밝혔다. “이럴 때는 으레 통일민주당도 일어나 야당 편을 들어주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그때는 달랐다. 뒤쪽 지도부에서 ‘우리 당은 조용히 있어라. 이제 평민당이 다 뒤집어쓰게 되었다’는 식의 의사가 전달되어 오는 게 아닌가.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나 민정당 의원들을 향해 ‘전두환이가 아직도 너희들 상전이야!’ 하며 소리를 질렀다. 결국 소동이 가라앉지 않자 전두환씨가 퇴장을 했고 나는 통일민주당 지도부를 향해 욕을 퍼부으며 명패를 집어 바닥에 팽개쳐버렸다.”


1990년 1월22일 텔레비전에 충격적인 장면이 나왔다. 청와대 접견실에서 대통령 노태우가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을 양옆에 세우고 ‘3당 합당’을 선언했다. “그 전날 저녁 우리는 박태준 민정당 대표위원이 초청한 국회 경제과학위원회 위원 부부 만찬에 참석했어요. 그 자리에서도 합당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는데, 바로 다음날 그런 일이 벌어지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어요.” 이날 대통령 노태우는 ‘3당 합당 공동발표문’을 낭독했다. 발표문은 “4당으로 갈라진 현재의 구조로는 나라 안팎의 도전을 효율적으로 헤쳐 나라의 앞날을 개척할 수 없다”며 “정책노선을 같이하는 정치세력이 뭉쳐 정책 중심의 정당정치를 실천해 당파적 이해로 분열·대결하는 정치에 종지부를 찍기로 했다”고 밝혔다. 김영삼은 “이번 결단은 위대한 결정이요, 혁명”이라고 말했다.
3당 합당이 이루어지기 전에 노태우는 박철언을 대리인으로 삼아 야당 총재들과 접촉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남편에게도 합당을 제의했다고 해요. 남편은 단호하게 거절했지요.”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노태우의 합당 제안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밝혔다. “오늘의 여소야대는 국민이 선택한 것입니다. 노 대통령께서도 여소야대가 하늘의 뜻이며 국민의 뜻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민정당과 평민당이 합치는 것은 민의를 배반하는 일입니다.” 김대중은 이런 말도 했다. “3당 합당만은 결코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국정을 펴는 데 불편한 것이 없잖습니까? 국익을 위해서라면 우리 평민당은 그동안 초당적인 협조를 했습니다. 여소야대라 하지만 모든 걸 만장일치로 합의해서 처리하고 있습니다. 여소야대라는 것도 한번 해봐야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됩니다.”
3당 합당은 노태우·김영삼·김종필 세 사람이 동상이몽을 꾸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민정당은 집권 연장을 노렸고, 김영삼은 대통령 자리를, 김종필은 내각제를 생각했다. 3당이 통합해 만든 민주자유당은 2월9일 합당결의대회를 열었다. 3당 합당으로 여소야대 국회가 사라졌다. 집권당은 전체 299석 가운데 218석을 거느린 공룡정당이 됐다. 5월 전당대회에서 노태우는 총재를, 김영삼은 대표최고위원을, 김종필은 박태준과 공동으로 최고위원을 맡았다. 통일민주당에서는 이기택·김정길·노무현을 포함한 의원 다섯 명이 합당을 거부하고 남아 민주당을 창당했다. 민주당은 ‘꼬마민주당’으로 불렸다. “3당 합당은 민의를 배반한 쿠데타적인 사건이었어요. 그 주역이 김영삼 총재였다는 것에 남편은 충격을 받았지요. 김영삼 총재가 아무리 사정이 어려워도 군사정권의 후예와 손을 잡을 거라고는 보지 않았거든요. 남편은 3당 합당을 보수대연합이 아니라 반민주·반호남 연합이라고 했는데 나도 그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 뒤로 호남 고립이 더 심해졌지요.”

거대 여당이 탄생하자 세상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어렵게 전진하던 민주화 흐름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1990년 3월2일 노태우 정권은 노조에 협조적이던 <한국방송>(KBS) 사장 서영훈을 몰아내고 <서울신문> 사장 서기원을 새 사장으로 임명했다. 한국방송 노조는 서기원의 사장 취임을 저지하는 제작거부 투쟁을 벌였다. 투쟁이 계속되자 노태우 정권은 4월30일 경찰 3000명을 투입해 사원 333명을 연행했다.
시국의 풍랑은 가라앉지 않았지만 1990년 6월 이희호 집안에 세 번째 화촉이 밝혀졌다. “막내 홍걸이가 서교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어요. 막내는 우리가 망명생활을 할 때 미국에 함께 있다가 뒤에 귀국했지요. 고려대에 복학했다가 방위로 군복무를 했는데 그때 고등학교 시절 친구 소개로 셋째 며느리를 만났어요. 부산에서 태어나 자란, 사업하는 집안 딸이었는데, 일본에서 디자인 공부를 했어요. 우리는 둘의 결혼에 일절 간섭을 하지 않았어요. 셋째 며느리까지 부산 태생이어서 며느리 셋이 모두 경상도 출신이 됐지요.”
1990년 7월 오스트리아 총리를 지낸 브루노 크라이스키가 세상을 떠났다. 이희호는 장례식에 참석했다. “남편이 몹시 바빠 크라이스키 총리 장례식에 내가 대신 갔지요. 둘째 홍업이랑 최운상 전 대사랑 함께 참석했어요. 크라이스키 총리는 1970년대에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 올로프 팔메 스웨덴 총리와 함께 유럽 사회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정치인이었어요. 브란트 총리, 팔메 총리와 함께 남편이 사형선고를 당했을 때 구명운동에도 앞장섰지요. 옥중에 있던 남편을 자기 이름을 딴 크라이스키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하기도 했고요. 장례식이 참 아름다웠어요.”
장례식이 끝난 뒤 이희호는 독일 베를린에도 들렀다. “전해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잖아요. 그래서 현장을 보려고 갔지요. 장벽이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어요. 사람들이 구멍이 난 장벽을 통과하는 걸 보고 나도 분단된 우리나라를 생각하면서 장벽을 넘어가 보았지요. 동독과 서독은 그해 10월에 정식으로 통일됐어요.” 이희호는 후에 빌리 브란트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브란트 총리가 1992년 10월에 세상을 떠났어요. 14대 대선 기간 중이어서 그때도 내가 남편 대신 갔지요. 전세계의 정치 수뇌들이 대거 조문객으로 참석했는데, 규모는 컸지만 아주 검소했어요.”


1990년 10월4일 탈영한 육군 이병 윤석양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국군보안사령부의 민간인 사찰 기록을 공개했다. 야당 정치인과 재야인사를 포함한 민간인 1600여명에 대한 불법 사찰 실태가 담겨 있었다. 정국은 커다란 회오리에 휩싸였다. 10월8일 김대중은 지방자치제 실시, 내각제 포기, 보안사 해체를 요구하며 평민당 당사에서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김대중 단식의 핵심 목표는 지방자치제 실시였다.
“남편은 국회에서 ‘미스터 지자체’로 불릴 정도로 지방자치제에 대한 신념이 강했어요. 1963년 국회에 들어간 뒤로 남북화해협력, 노사공동위원회, 지방자치제가 이루어져야 민주주의가 완성된다고 기회가 날 때마다 말했어요. 1971년 대통령 선거 때도 지방자치제를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고요.” 지방자치제는 1989년 2월에 여야 4당이 실시하기로 합의하고 관련 법도 통과시킨 터였다. “그런데 3당 합당을 하고 나서 여당에서 지방자치제 실시를 연기하려고 했어요. 남편은 이대로 밀리다가는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보고 단식을 결심했지요.”
김대중이 단식투쟁을 시작하자 이희호는 거처를 당사로 옮겼다. “보리차를 끓이며 남편 곁을 지켰어요. 단식 중에 먹을 수 있는 게 보리차뿐이잖아요. 5일쯤 지나자 몸이 급속도로 쇠약해졌어요. 주위에서 나에게 단식을 중단하게 해달라고 했는데, 끝까지 그 말을 못 했어요. 보리차를 끓일 때 남편 몰래 다시마를 넣었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지요.”

10월13일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야당과 재야 공동주최로 ‘보안사 불법사찰 규탄과 군정 청산 국민대회’가 열렸다. ‘꼬마민주당’ 총재 이기택은 “노태우 정권 퇴진만이 우리 국민의 유일한 선택”이라며 “정권 퇴진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은 야권통합”이라고 외쳤다. 김대중은 단식으로 몸이 쇠약해져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단식 8일째에 탈수현상이 심해졌어요. 당직자와 비서들이 놀라서 남편을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지요.” 김대중은 병원에서도 단식을 멈추지 않았다. 평민당 의원 30명도 15일부터 동조단식에 들어갔다. 10월20일 마침내 노태우 정권이 1991년 상반기에 지방자치 선거를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정부의 약속을 받고서야 남편은 단식투쟁을 끝냈어요. 13일 만이었어요. 그 후로도 한동안 단식 후유증으로 고생했지요.” 그러나 이듬해 1월 노태우는 지방의회 선거만 먼저 치르고, 자치단체장 선거는 1~2년 뒤로 미루겠다고 말을 바꾸었다.
김대중의 단식투쟁으로 불완전하게나마 지방자치제 시대가 다시 열렸다. 박정희 쿠데타로 중단된 지 30여년 만이었다. “그렇게 고생해서 지방자치제 선거를 얻어냈는데 이듬해 3월에 치른 기초의회 선거랑 6월에 치른 광역의회 선거에서 야당이 모두 패배하고 말았지요.” 3월26일의 기초의회 선거에서 친여 후보 당선자는 전체의 75%에 이르렀다.


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