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정치 60년, 선량들이 낳은 진기록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09-08-13 14:30     조회 : 7336    

의회정치 60년, 선량들이 낳은 진기록
기사입력 2008-08-25 13:35 [조선일보]
 

 

2008년 6월 말 현재 금배지를 달았거나 달고 있는 선량은 연인원 4728명(실제 인원 2628명)이다. 이들 가운데 대통령이 된 의원(이승만 윤보선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이 있는가 하면 48시간짜리 의원도 있다. 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의원(조봉암, 최인규, 김규남)이 있고, 현재 재판을 받고 있는 전·현직 의원도 있어 인간사의 부침을 실감케 한다.

1948년 5월 제헌국회가 개원한 이래 올 5월29일까지 법정 임기를 다 채운 국회는 제헌을 비롯해 2·3· 7· 9·11대와 13~17대 등이다. 나머지 6개 대(代)의 국회는 정변과 개헌 등을 이유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했다.


이 가운데 ‘10월 유신’으로 탄생한 유신정우회가 포함된 9대는 가장 긴 6년간 존속했다. 5·16군사정변으로 해산된 5대 국회는 9개월 18일 동안만 활동해 최단기록을 세웠다. 다행히 1987년 민주화 이후 구성된 1988년 5월의 13대부터는 법정 임기 4년을 순조롭게 마쳤거나 채워가는 중이다.


4·19혁명 후 구성된 5대는 유일하게 참의원과 민의원으로 구성됐고, 9대와 10대는 민선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은 유신정우회로 구성됐다.


18대까지 배출된 국회의장은 모두 20명이다. 이들 중 최장수는 6·7대 양대에 걸쳐 의장을 역임한 이효상으로, 7년6개월14일을 재임했다. 2위는 9대의 정일권(만 6년 재임)이고, 3위는 3·4대의 이기붕으로 5년11개월 동안 본회의장 의사봉을 잡았다.

가장 짧기로는 제헌국회의 이승만으로 1948년 5월31일부터 그해 7월24일까지 55일간 재임했다. 이승만은 그해 8월15일 정부 수립과 동시에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국회 수장 경험을 갖고 있는 셈이다.


동아일보, 국회의장 5명 배출

특기할 점은 역대 국회의장 중 곽상훈 이만섭 김원기 임채정 김형오 등 5명이 동아일보 출신이란 점이다. 전체의 25%를 한 언론사가 배출한 셈이다. 한편 역대 국회부의장은 모두 66명이다.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눈을 감은 현직 사망 의원은 제헌국회의 이병국(충남 천안)부터 2006년 11월 사망한 구논회(대전서을) 등 수십명이다. 6·25전쟁 때는 74명이 납북됐다. 특히 최윤호(2대 전북 김제을) 김홍용(2대 전남 담양) 이종린(제헌·2대 충남 서산갑)은 6·25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학살당했고 자유당 정권의 2인자인 이기붕(3대 서울 서대문을 을, 4대 경기 이천)은 4·19혁명의 함성에 밀려 경무대에 피신 중 가족과 함께 자살했다. 또 조창대(6대 전국구, 7대 경남 진해창원)와 신기하(12대·광주동북·13·14·15대 광주동)는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국민적 슬픔을 안기고 별세한 의원은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등록해 놓고 선거운동 기간 중 사망한 신익희(제헌·2·3대 경기 광주), 조병옥(3대 대구을, 4대 서울 성동을)이다. 신익희는 1956년 5월 ‘이(이승만)리 조(조봉암)리 가지 말고 신(신익희) 장(장면)로로 바로 가자’는 구호로 붐을 일으키다가 선거 유세를 위해 여수로 가는 전라선 열차 안에서 급서했다. 조병옥은 1960년 2월 “낫는 대로 지체 없이 달려오겠다”는 대국민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수술 중 별세했다.


의원 선서는커녕 금배지도 달지 못하고 세비도 못 받았으며 본회의 참석도 해본 일이 없는 전직 의원이 있다. 1961년 5월13일 5대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정인소(충북 음성) 김사만(충북 괴산) 김성환(전북 정읍을) 김종길(경남 남해)이 그 주인공. 보선 실시 3일 뒤에 5·16군사정변이 일어났기 때문에 기록상으로 이들은 14~16일 3일간 재임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14일 아침에 당선이 선포되고 16일 아침 국회가 해산됐으니 ‘48시간짜리’ 의원이다.




같은날 당선된 김대중은 이후 국회의원을 지내고 대통령까지 역임했지만 이들 4명은 끝내 재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이력서상의 전직 의원’ 신세를 감수해야 했다. 2대부터 8대까지 8회(6대 서울 서대문 보선 포함)나 출마한 정인소와 3~7대에 걸쳐 5회 출마한 김사만에게 48시간 재임은 너무나 처량한 전과(戰果)였다.


5일 의원도 있다. 6대 말 당시 신민당 전국구 후보 17,18번이던 박중한 우갑린이 주인공. 두 사람은 같은 전국구 의원인 류진 임차주가 탈당으로 의원직을 상실함에 따라 1967년 6월26일 승계가 공고되어 임기 말인 그달 30일까지 재임했다. 7대 의원선거가 이보다 앞선 그해 6월8일 실시된 것을 감안하면 7대 의원 당선 공고 후에 6대 의원이 뒤늦게 탄생한 것이다. 전국구 의원 승계 제도가 낳은 소극(笑劇)이라고 할 만하다. 이들은 본회의 출석 한 번 하지 않았지만 금배지와 한 달 세비 20만원(당시)을 고스란히 수령했다.


최다선은 9선으로 3명(김영삼 김종필 박준규)이다. 이 중 박준규는 8대에 보궐선거에서 한 차례 당선된 것을 포함해 9번을 선거구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당선됐기에 더욱 값진 기록이다(8대 서울 성동 낙선). 김영삼과 김종필은 전국구와 유정회 당선이 포함돼 있다(김영삼은 4대 부산서갑에서, 김종필은 17대 전국구에서 각각 낙선 경력이 있다).


8선도 모두 3명(김재광 이만섭 정일형)이다. 이 중 정일형은 2대부터 9대까지 내리 8번을 같은 선거구(서울 종로.중구)에서 지역구최다선으로 당선됐다. 가까운 장래에는 깨지기 힘든 기록일 것이다.


서울 성동구의 제헌의원은 이청천(李靑天)이고 2대 의원은 지청천(池靑天)이다. 기묘한 우연이다 싶지만 사실은 상해 임시정부 군사부장을 지낸 같은 사람이다. 만주 등지에서 독립군 사령관을 지낸 그는 군사상 필요 때문에 많은 변성명을 사용했는데 본명은 지대형(池大亨)이다. 제헌국회 본회의나 상임위 활동 때는 본명을 써서 그는 국회 기록상 3개의 성명을 남긴 유일한 의원으로 돼 있다.


異名同人, 同名異人

홍창섭(洪昌燮 2·3대 강원 춘천)과 홍창섭(洪滄燮 8대 강원 춘천춘성·9대 강원 춘천춘성철원화천양구)도 같은 사람이다. 2·3대 때 국회 운영위원장과 농림위원장 등 요직을 거친 그는 4대 때 민주당의 계광순에게 패배하자 창섭(滄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昌자의 운세가 다했다는 친지의 조언이 있었던 데다 마침 친척 중에 같은 이름을 쓰는 이가 있어 한자를 바꿨다는 것이 그의 변이다. 1960년 강원도지사 재임 때 4·19혁명을 만나 2년여의 옥고를 치른 그는 7대에선 낙선했으나 8, 9대에 연속 당선됐다. 개명의 효험을 톡톡히 본 셈이다.


김대중(金大中)과 한건수(韓建洙)도 비슷한 사례. 김대중의 원래 한자 이름이 金大仲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고, 한건수도 원래는 한건수(韓鍵洙)였으나 2대 선거(충남 예산) 때 낙선하자 ‘쇠금(金) 변’을 없애버렸다. “1년에도 수천수만통의 엽서와 편지를 써야 하는 마당에 ‘鍵’자는 너무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건수(韓建洙)란 이름으로 선거구민과 교환한 수많은 엽서 및 편지를 법원에 제출, 개명 허가를 받았다. 3·4·5대에선 연속 고배를 마셨으나 6·8·9·10대 때 원내에 진출해 소망을 이뤘다.


조종호(趙鍾淏 4·5대 충북 단양·11대 서울 동작·12대 전국구)는 색다른 케이스. ‘淏’자는 조선 중종의 위로, 조선시대엔 일반 통용이 금지됐던 벽자(僻字). 그는 재선 직후 ‘淏’를 ‘昊’로 간소화했는데 “어려운 한자를 쓰다 보니 일반인이 읽기 불편했고 각 인쇄소에 그 활자가 없어 명함 한 장 제대로 찍을 수 없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 6~10대에 잇따라 고배를 마신 그는 11·12대에 연속 당선되어 4선을 기록했다.


언론인 최영철(崔英喆)로 일반에게 알려진 최영철(崔永喆 9대 유정회, 10~12대 전남 목포무안신안)은 전자가 필명이고 후자가 호적상 이름이다.


역대 의원 중 한글 이름이 똑같은 선량은 부지기수다. 이들 중 김동욱과 김영선, 김영수, 김태수, 이종순은 각각 3명에 이른다. 김동욱은 金東郁(3대 부산정·4·5대 부산서을)과 2명의 金東旭(9대 유정회, 10대 경남 충무통영거제고성·12대 전국구·15·16대 경남 통영 고성)이 있다. 김영선은 한자가 다른 金永善(2·3·5대 충남 보령)과 金永先(11·12대 경기 남양주양평·13대 경기 가평양평), 金映宣(15·16·17대 전국구·18대 경기 고양일산) 3명으로 金映宣은 4선의 현역 의원이다.


김영수는 金永修(5대 경북 영덕)와 金榮洙(10대 유정회), 金榮秀(14대 전국구) 3명이고, 김태수는 2명의 金泰洙(제헌 경남 창원갑, 11대 서울 도봉), 金泰守(12대 전국구) 3명이다. 또 이종순은 李鍾淳(제헌 강원 춘성), 李鍾純(2·5대 충남 부여을), 李鍾諄(6대 부산동) 3명이다.








 

부부의원과 부자의원, 형제의원


한글은 물론 한자도 같은 동명이인도 있다. ▲강경식姜慶植 (12대 부산진·14대 부산 동래갑·15대 부산 동래을과 12대 전국구) ▲김효석金孝錫 (제헌 경남 합천을과 16·17대 전남 장성담양곡성 및 18대 전남 담양곡성구례) ▲박세환朴世煥 (15대 전국구·16대 비례대표와 17대 강원 철원화천양구인제) ▲이종찬李鍾贊 (9·10대 유정회와 11·12대 서울 종로중·13·14대 서울 종로) 이 대표적이다.

1974년 10월12일 국회 본회의에서 서영희(유정회)가 질문을 하기 위해 등단할 무렵이었다. 국회의장 정일권이 세 번째인 서영희의 질문 순서를 두 번째로 앞당겼기 때문에 신민당 의석에선 항의 소리가 있었다.


이때 공화당 의석의 김제원(8대 당시 충남 대덕연기·9대 충남 금산대덕연기)이 신민당 의석을 향해 “시끄러워! 누가 의장인지 모르겠네”라고 고함쳤다. 그의 고함에 장내는 한동안 웃음꽃이 피었다. 서영희는 남편 김제원의 자상한 ‘외조’에 힘입어 긴장감 돌던 장내 분위기를 누그러뜨린 뒤 무사히 질문을 마칠 수 있었다. 이들은 1973년 3월 9대 의원에 같이 당선된 후 그해 8월 “국가관의 일치가 마음에 들었다”며 결혼했다.


2004년 4월 17대 총선에서 최규성(17·18대 전북 김제 완주)과 이경숙(17대 비례대표) 부부가 동시에 금배지를 달고 등원했다. 부부 동시 등원 첫 사례다. 이밖에 박철언(13대 전국구,14·15대 대구 수성갑)이 14대 때 의원직을 상실하자 부인 현경자가 남편 지역구에서 보선에 출마해 당선됐다. 15대 전국구 김찬진의 부인 이영애는 18대에 등원하여 부부 의원 경력을 보유하게 됐다.


아버지와 두 아들 곧 3부자가 의원을 역임한 네 가정이 있다. 유석 조병옥의 두 아들 윤형(5· 6·7· 8·13·14대), 순형(11·12·14·15·16·17·18대)을 비롯해 아버지 이재학(제헌·2·3·4·5대)과 교선(5·8대), 응선(13·15대) 형제, 아버지 김대중(5·6·7·8·13·14대)과 홍일(15·16·17대), 홍업(17대) 형제, 아버지 김동석(4대)과 윤환(10·11·13·14·15대), 태환(17·18대) 형제가 그들이다.


첫 부자 의원의 영예는 제헌의 서정희(경기 포천)와 2대의 아들 범석(당시 경기 옹진갑)이 차지했다. 또 정석모 진석 부자는 두 사람이 합해 10대부터 18대까지 연속 9선을 기록 중이다. 정일형 대철 부자는 합해서 13선을 기록했다.



 

이밖에 부자 의원은 ▲김성곤(4·6·7·8대)과 석원(15대) ▲김진만(3·4·6·7·8·9·10대)과 택기(16대) ▲김진재(11·13·14·15·16대)와 세연(18대) ▲남평우(14·15대)와 경필(15·16·17·18대) ▲류치송(6·9·10·11·12대)과 일호(18대) ▲이중재(6·7·8·9·12·15대)와 종구(17·18대) ▲정주영(14대)과 몽준(13·14·15·16·17·18대) 등이 대표적이다.


형제 간에 의원을 많이 배출하기로는 전남 담양의 김씨 3형제가 단독 수위. 동생인 김문용이 제헌의원 선거 때 입후보해 정치인으로서의 뜻은 먼저 세웠으나 고배를 마셨다. 2대 때는 맏형 김홍용이 출마해 당선, 형님이 먼저 금배지를 달았다. 그러나 곧이어 발발한 6·25전쟁 때 김홍용이 북한군에 학살당하고 그를 잇기 위한 보궐선거에서 동생 문용이 당선돼 남은 임기를 계승했다. 그는 3대 때 달변으로 유명한 박영종에게 패하자 곧 정계를 은퇴했다.


두 형의 뒤를 이어 정계에 투신한 사람이 막내 김성용. 그는 5대 첫 출마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6· 7대에 야당의 전국구 후보로 당선됐다. 그 후 잠시 외교관 생활(말레이시아 대사)을 하다가 9대 때 유정회 의원으로 다시 등원해 3선을 기록했다. 이들 3형제의 동기간은 모두 3남4녀인데 강세형(3대 전북 익산을)이 매형이어서 7남매 중 4명이 의원 가정을 이룬 셈이다.


또 이들 3형제의 누나 김사순이 바로 자유선진당 총재 이회창(15·16·18대)의 모친이다. 이회창은 결국 외삼촌 3명과 이모부를 국회의원으로 둔 셈이다.


이밖에 대표적 형제의원으로 현 이명박 대통령(14·15대)과 이상득(13·14·15·16·17·18대)을 비롯해 ▲김광준(제헌·2·5대)과 명윤(5·9·15대) ▲김종익(7·8·9대)과 종필(6·7·8·9·10·13·14·15·16대) 등이 있다.


18대 들어 처음으로 전현직 부녀 의원이 탄생했다. 3대 서울 종로을과 6대 서울 용산(보선)에서 당선된 김두한의 딸 을동이 친박연대 비례대표로, 또 10대 유정회 이경호의 딸 영애가 18대 자유선진당 비례대표로 각각 당선됐다. 이영애는 아버지와 남편이 국회의원 경력을 가진 첫 의원이 된 셈이다.








숙적(宿敵), 최근소 표차 당선

충남 천안의 이상돈(제헌보선· 5·6대)과 김종철(4·7·8·9·10·12대)은 20여 년 동안 맞대결을 펼친 전국 최장기 숙적. 이들이 싸운 타이틀매치는 6회로 스코어는 똑같이 3승 3패. 첫 라운드는 제헌의원 선거로 이상돈이 1만표, 김종철이 1700표를 얻었으나 두 사람 다 낙선했다(당선자 이병국 1만9000표).


이들은 4대 때부터 8대까지 연속 5회에 걸쳐 본격적으로 맞붙었다. 4대 때는 자유당 공천을 받은 김종철이 민주당 공천을 받은 이상돈을 4000표 차이로 제압했으나 5대 때는 이상돈이 2000표 차이로 설욕했다. 이상돈은 여세를 몰아 6대 때 공민의당 공천을 받은 김종철을 3000 표 차로 눌러 3승 1패로 우위를 선점했다. 그러나 7대 때 김종철이 공화당 공천을 받음으로써 전세는 반전돼 김종철이 7·8대에서 연승했다. 9대 때는 이상돈이 선거구를 서울 성북으로 옮기는 바람에 맞대결이 무산됐다.


16대 경기 광주에서 박혁규는 1만6675표를 얻어 1만6672표를 얻은 문학진보다 단 3표가 많아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재검표 결과도 똑같아 결국 문학진은 ‘문세표’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1969년 8월30일 오전 7시30분 국회 법사위. 신민당 박한상(6·7·8·9·10·12대 서울 영등포)의 발언 도중 공화당 노재필(6·7대 경남 양산동래)이 사회자에게 “상정 안건에 대한 질의만 하게 하자”고 제의했다. 그러자 발언대에 있던 박한상이 “자다가 일어나 무슨 잠꼬대냐”고 쏴붙였다.


사실 공화당 의원들은 그때 막 잠에서 깨어난 상황이었다. 그들이 잘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박한상의 질문이 지난밤에 이어 이날 아침까지 계속됐기 때문. 3선 개헌 국민투표 절차법인 국민투표법안의 처리를 저지하기 위한 필리버스터(의사 진행 방해)였다. 박한상은 시간을 끌기 위해 각종 개헌 지지와 반대 성명, 대통령 담화, 헌법, 공무원법 등을 줄줄이 인용했다.


박한상의 이날 발언 시간은 10시간(29일 밤 11시10분 ~ 30일 오전 9시10분). 7대 국회는 물론이고 역대 국회 최장 발언이며 속기사만도 60여 명이나 동원된 진기록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것도 옛날 얘기. 현재 국회는 본회의 발언을 30분으로 제한하고 있으며 규정 시간을 넘기면 마이크가 자동으로 꺼진다.


반면 역사상 가장 짧은 발언은 3대 하을춘(경남 창녕)의 ‘4자 발언’. 그는 본회의의 건설법안 심의 때 등단, “건설법안…” 하며 서두를 꺼내다가 의장이 일괄 통과를 선포하는 바람에 하단했다. 하을춘의 이 발언은 1초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이 역시 좀처럼 깨기 어려운 기록이다.


이를 뒤이은 짧은 발언 기록으로는 역시 3대 때의 무소속 김동욱(부산정)이 한 3초 발언. 야당의원 데모로 김선태(3·4·5대 전남 완도)가 구속됐을 때 야당은 석방 요구안과 관계 국무위원 불신임 결의안을 내놓았다. 김동욱은 이의 토론을 위해 등단, 국무위원석을 향해 “왜 잡아갔어, 왜 잡아가!”라고 큰소리로 질타하고는 하단했다. 이는 가장 짧은 시간에 할 말을 다한 ‘초능률’ 발언으로 남아 있다.


말을 가장 빨리 한 의원은 김선태. 그는 1분에 468자를 쏟아냈다고 한다. 속기사의 최대 속기 능력은 1분간 320자밖에 안돼 그의 발언 때에는 속기사들이 진땀을 흘렸다는 후문. 김선태 때문에 2명 동시 속기제 전통이 비롯됐다는 것이 국회 주변의 통설이다.

박영종은 역대 최고의 다변가(多辯家)로 꼽힌다. 그가 3대 국회 4년 동안 본회의에서 행한 발언은 모두 450회. 2위가 251회(조영규), 3위가 240회(이충환)였으니 가히 족탈불급의 경지라고 할 만하다.

국회가 처음 열린 1948년 5월31일 첫 사회는 이승만이 맡았다. 그가 혁혁한 독립투사였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최고령(74) 의원이었기 때문. 그는 자신의 사회로 자신을 초대 국회의장으로 뽑은 본회의를 진행했다.









 

최고령과 최연소, 최다 출마

국회법은 국회가 개원할 때 최고령자가 사회를 맡도록 명문으로 정해놓고 있다. 역대 최고령자는 14대 85세의 문창모, 최연소자는 26세의 3대 김영삼이다. 5대 전휴상도 26세에 당선됐으나 선거일 기준 김영삼이 26년 4개월11일, 전휴상이 26년 6개월19일로, 김영삼이 2개월 정도 젊다.


한편 역대 최다 출마자는 18번의 총선 중 13번이나 출마한 김두섭(14대 경기 김포)이 단연 으뜸이다. 김두섭은 4·19 후 5대 때부터 18대 4·9 총선까지 한 번을 제외하고 모두 출마했다. 김두섭 다음으로는 최다선 3인 중 1명인 박준규로, 3대 때부터 10대(8대 보선 포함)까지 연속 출마한 데 이어 13·14·15대에도 출마해 모두 12번을 기록했다.


또 다 같은 금배지를 달았지만 그들이 얻은 표수는 천차만별이다. 22만표 의원이 있는가 하면 1000표 의원도 있고 근 10만여 표를 얻고도 낙선한 사람도 있어 세상사의 불공평을 실감케 해준다.


역대 최다 득표자는 12대 서울 강동에서 22만7598표를 얻은 김동규이고, 2위는 10대 김수한(서울 관악)으로 21만2061표를 얻었다. 표수로 치면 참의원이었던 여운홍(경기)이 43만9755표로 단연 선두이나 도 단위 선거이고 1회밖에 실시되지 않아 비교 가치가 없다.


가장 적은 표수로 원내 진출에 성공한 사람은 1058표의 5대 손치호(당시 경기 옹진). 그가 얻은 표수는 같은 5대 김상돈의 득표에 비하면 57분의 1에 불과하다. 선거구가 작기도 하지만 후보가 17명이나 난립해 표가 분산됐기 때문이다. 손치호에 이은 최소 득표는 재선거에서 바로 손치호를 누르고 역전승을 거둔 장익현의 1477표.


역대를 통틀어 1000표대 의원은 손치호 장익현 외에 전석봉(5대 경북 울릉 1513표), 최병권(3대 경북 울릉 1741표), 신기복(5대 강원 금화 1752표) 등으로 모두 5명이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 이후 6대부터 선거구 규모가 커짐에 따라 1만 표 미만짜리 의원은 구경할 수 없게 됐다.


단위 선거구 가운데 국회의원 지망자가 가장 많았던 지역은 2대 선거 때의 전북 전주와 완주을. 1950년의 이 선거에서 두 곳은 각각 27대 1의 경쟁률을 보여 우리나라 선거사상 최고 경쟁률을 기록했다. 특히 완주을의 경우 1개면(조촌면)에서 6명이나 입후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전주에서 출마한 27인 가운데는 현재 전직 국회의원들의 모임인 헌정회 회장인 당시 29세의 이철승(3·4·5·8·9·10·12대)도 포함됐다.



18대까지 무투표 당선자는 이승만(제헌)을 비롯해 모두 24명이다. 이들 중 제헌국회에서 절반인 12명이 나왔고, 3대 1명, 4대 6명, 9·11대 각 2명 등이다.


경북 영양과 영천은 두 번에 걸쳐 무투표 당선자를 배출했다. 그러나 12대 이후엔 무투표 당선자가 없다. 다만 15대 광주동구 보궐선거에서 이영일이 무투표 당선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이기홍 언론인 kihong4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