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이름 앞에 민주주의라고 쓴다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18-09-03 13:08     조회 :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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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이름 앞에 민주주의라고 쓴다
 
기사입력 2018-09-01 14:37  기사원문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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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건국의 유공자인 8선 의원 정일형은 박정희 군사독재를 비판했다. 그의 아내 이태영은 여성 최초의 사법고시 합격자였다. 이 부부는 민주화 운동을 하다 국회의원직·변호사직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 가운데 최다선(最多選) 기록은 9선이다. 아홉 번 국회의원을 했다는 얘기야. 임기가 대개 4년이었으니 36년 동안 국회의원 노릇을 했다는 거지.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 그리고 박준규 전 국회의장이 아홉 번 금배지를 달았다. 8선도 네 명이야. 김재광, 이만섭, 서청원, 그리고 네게 이야기해주려는 정일형 의원(1904~1982)이지.



1974년 6월, 대정부 질의를 하는 정일형 의원. ©연합뉴스
정일형 의원은 황해도 안악군 태생이야. 원래는 유복한 집안이었는데 사업가인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연이어 돌아가시면서 순탄치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 “친척집 건넌방에서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눈물만 흘리는 나날을 보냈다”라고 본인의 자서전에서 얘기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환경에 굴하는 사람이 아니었어. 1919년 3·1운동 때는 앞장서서 만세 시위에 뛰어들어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고,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모교인 연희전문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독립의 의지를 꺾지 않아 모진 옥고를 치르기도 했어.

어느 날 감옥에서 나와 아내 손을 잡은 정일형은 그만 목이 메고 말았어. 아내의 오른손 엄지가 90°로 젖혀지고 검지와 중지도 기형이 되었던 거야. 아내는 남편 옥바라지하는 한편 살림을 꾸려가기 위해 삯바느질을 했는데,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이 쇠붙이라는 쇠붙이는 박박 긁어가는 바람에 제대로 된 가위를 구할 수가 없었어. 제대로 들지도 않는 무딘 가위를 억지로 놀리며 가위질을 하다 보니 그만 손가락이 휘었던 거지. 그렇게 어둡고 괴로운 밤이 지나고 해방의 동이 튼 거야. 정일형은 새 나라 건설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미군정청 일도 맡았어. 아내에게 그는 이렇게 자신의 감격을 전했다고 해. “서울 거리를 걸어도 뒤에 아무도 따라다니는 사람이 없는 자유로운 몸이 되었소. 나를 가둘 사람이 없으니 훨훨 날아다니고 있소.”

정일형은 그 환희의 순간에도 지난날 자신 때문에 모진 수난을 겪은 아내의 꿈을 잊지 않는 남자이기도 했어. “이제 보따리를 바꿔 멥시다. 기다리던 세월이 왔으니 평생 소원하던 법률 공부를 하시오(최종고, <한국의 법률가>).”

정일형의 아내 이태영은 이화여전 가사과를 나왔지만 원래 꿈은 법률가였어. 삯바느질하며 남편 옥바라지를 하고 아이 넷을 키우는 북새통 속에 가슴속 깊숙이 묻혀버린 듯한 아내의 꿈을 정일형은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공부하시오. 애들은 내가 보고 주변에도 부탁해보겠소.” 아내 이태영은 그야말로 ‘앉았던 삿자리에 구멍이 날 만큼’ 눈에 불을 켜고 공부했고 1952년 여성 최초의 사법고시 합격자가 됐지.

이때 정일형은 초선 의원이었어. 1950년 2대 총선에서 서울 중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으니까. 아내 이태영이 사법고시에 합격한 1952년은 한국 정치 흑역사라 할 부산정치파동이 있던 해였고, 정일형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개헌안을 통과시키려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결연히 맞섰단다. 그 탓에 이태영은 꿈에 그리던 판사 임용을 받지 못해. 이승만 대통령이 “야당 하는 정일형 마누라를 판사 시킬 수 없다!”라고 거부했던 탓이라지. 정일형의 이후 국회의원 생활은 양지의 꽃길보다는 음지쪽의 비포장도로에 가까웠다. 특히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의 재임 기간 내내 정일형은 야당의 투사로서 또 베테랑 의원으로서 자기 위치를 잡게 돼.



&copy;연합뉴스 정 의원의 부인 이태영 여사가 1985년 미국에서 귀국한 ‘재야 지도자 김대중’을 반기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헌법에 규정된 3선 금지 조항을 없애기 위한 개헌을 시도할 때 정일형은 이렇게 부르짖으며 반대했어. “민주주의는 결코 몇 사람이 고안한 것이 아닙니다. 수백 년 동안 피의 항쟁을 통한 경험의 소산이요, 인간 이지(理智)의 발현입니다. (…) 대통령 3선 금지 문제는 어떤 논리와 결론이 아니라 차츰차츰 발전해온 민주 역사의 가르침이요, 그 교훈이 우리로 하여금 3선 개헌을 대하는 논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 민주주의는 특출한 몇 사람이 발명한 게 아니야.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서로의 존엄성을 인정한 바탕 위에, 가능하면 더 많은 사람의 자유와 그 사이의 평등한 관계를 추구하는 가운데,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가에 대한 격렬한 토론과 수정을 거쳐 제 모습을 갖춰가는 ‘과정’이겠지. 정일형은 자신이 속한 집단, 일제강점기의 한민족이 언젠가는 존엄한 민족으로 독립할 것을 확신하고 그 존엄함을 구현하기 위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어. 그리고 “훨훨 날아다녔던” 해방의 순간에 자신이 밖으로 나도는 동안 일상에 파묻혀 살던 아내의 꿈을 생각할 줄 알았던 사람이야. ‘짐을 바꿔 들 줄’ 알았던 거란다.

17세 연하의 후보 사무장을 자청한 ‘6선 의원’

1970년 야당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정일형은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후배들 가운데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지. 김대중 후보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경선 당시 정일형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단다. 당시 6선 의원이던 정일형은 17세 연하의 대통령 후보 선거 사무장을 자청하며 선거운동에 나섰기 때문이야. “내리 6선의 경륜을 가진 분이 ‘김대중 동지를 대통령으로’라고 씌어 있는 피켓을 들고 호소하고 있는 장면은 당원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주었다(이희호, <동행>).”

존엄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존엄함을 무너뜨리려는 세력에 저항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해. 정일형은 우러러볼 만한 용기의 소유자이기도 했단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질식시켜가던 박정희 정권은 또 하나 세계의 손가락질을 받을 짓을 벌였어. 일본에 머물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납치해온 거야. 이 엄청난 사실 앞에서도 유신 정권에 길들여진 야당은 별 움직임이 없었어. 그때 정일형이 나서. 국회의장이 그만하라고 아우성치고 여당 의원들이 악을 쓰는 가운데 8선 의원 정일형은 목소리에 날을 세웠지.

“솔직히 말해서 나는 무엇 때문에 한 정권이 개인을 상대로 이토록 심한 피해망상증에 걸려 있는지 알 수가 없소! 사건 내용으로 보나 규모로 볼 때 아무나 범인이 될 수 없소. 외국에서는 물론이고 많은 국민이 이번 사건을 중앙정보부 소행이라 단정하고 있소. 내 생각도 그런 것 같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생각 마시오.”

연설은 열네 번이나 중단됐고 단상에 뛰어오른 여당 의원들은 정일형을 차고 짓밟았어. 장출혈이 일어날 만큼의 중상. 그래도 정일형은 굴하지 않았단다. 1976년 3월1일, 정일형은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운동 기념 기도회에 참석, 긴급조치 폐지와 의회정치 회복, 사법 독립을 외치는 촛불시위를 벌였어. 이로 인해 정일형은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하고 집회에 함께했던 아내는 변호사직을 잃었단다. 관련 재판 최후 진술에서 정일형은 이렇게 외친다. “내가 항일 투쟁할 때 일본군의 앞잡이는 누구이며, 내가 반공 대열에 섰을 때 여순반란 사건에 가담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내가 민주화 운동을 할 때 독재자로 전락한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박정희였지. 그리고 당시 절대 권력자 박정희를 두고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 그 이름은 독립운동가이자 건국의 유공자이자, 민주화 운동가이자 8선 의원 정일형이었다.

김형민 (SBS CNBC PD)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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