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영박사 서거 20주기 추모식 "김숙자 총장"추모사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18-12-26 13:27     조회 : 526    
   감정숙_총장_추모사.hwp (26.0K), Down : 2, 2018-12-26 13:27:59
추모사를 해 주신 김숙자 총장님은 (배화여자대학교) 이태영박사님의 법학과 첫 번째 제자로 명지대학교 법학과 교수로 재직하시면서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교육연구 자원봉사부분 부소장으로 이태영박사님과 함께 법률구조활동 및 여성의 법률적 지위향상을 위해 활동 하셨습니다.

              이태영 박사님 서거 20주기에 추모사를 바칩니다.

지난 10월1일에도 이태영 박사님, 정일형 박사님의 묘역을 찾았습니다. 그날은 묘역 앞 보수 작업이 한창이었습니다. 머릿속으로 두 분의 모습을 그려 보며, 오늘 이태영 박사님 서거 20주기를 맞이하여 박사님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추모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과 함께 추모의 마음을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1963년 이화여대 2학년 때, 법정대학 학장님으로 오신 박사님을 처음 만나 뵈었습니다. 고시공부를 해서 판사가 되고자 했던 제가, 롤 모델인 이태영 변호사님을 만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1971년까지 8년간을 이화여대에 계시는 동안, 이태영 박사님은 많은 제자를 기르시고 사랑하셨는데 부족한 저는 그 제자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너무 갑자기 제게 추모사를 부탁해서 사양했습니다만, 그러나 “내가 죽으면 네가 추도사를 해라”, 하셨는데 애제자 중의 하나였던 제가, 우여곡절 끝에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던 제가 박사님의 서거 20주기에 추모하는 말씀을 올려야 마땅하다는 결단을 내리며, 만사를 무릅쓰고 오늘 이 자리에서 추모사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변호사, 최초의 여성법학박사,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설립자이며 영원한 소장님, 여성해방운동의 대모, 나아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여성투사 등으로 알려진 이태영 박사님의 생애업적과 활동에 광하여는 여러분께서는 이미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또한 서울시 중구 구민들이 배출한 8선 국회의원이신, 거물급 정치인 정일형 박사님의 아내이신 이태영 박사님, 역시 중구가 낳은 5선 의원 정대철 현 민주평화당 고문의 어머니이신 이태영 박사님, 현재 민주평화당 서울특별시 당 위원장이시고 중구, 성동을 지역위원장을 맡고 계신 19대 정호준 국회의원의 할머니이신 이태영 박사님..., 이렇게 중구 구민의 자랑이요, 우리나라 명문정치인 집안의 이태영 박사님과 그 가족 관계도 여러분은 익히 알고 계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태영 박사님의 크나 큰 업적과 활동상황 등에 관련해서 보다는,  박사님의 가르침을 받고 사랑을 받은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늘 선생님, 하며 모시던 호칭으로 선생님과의 개인적 추억을 떠올리며 여러분과 함께, 하늘나라에 계신 선생님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추모의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저는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고시공무를 하기 시작했던 때부터 거의 15년간 병명도 모르고, 그 원인도 알지 못했던 병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저 불치의 병으로만 알면서 이런 치료, 저런 치료 방법으로 연명하며 긴-세월 동안 병고에 시달렸습니다. 서른도 살기 어렵겠다고 했고, 결혼을 하면 더 일찍 죽게 될 것이고 아이도 낳지 못할 것이라고 했던 그 시절에, 저를 위해 기도하시고 애통해 하시던 선생님, 저의 버팀목이 되셨던 선생님을 기다리고 추모합니다.
어렸을 적부터 판사 되기를 꿈꾸었던 제게 닥친, 병마와의 싸움은 저를 참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외롭고 견디기 힘든 세월에 이 병원 또 저 병원을 찾아 헤매고 유명하다는 한의원을 찾아다닐 때, 간혹 저를 부축하고 다니면서 격려해 주던 한 남학생은 저의 가족에게 보다,
먼저 선생님께 저와 결혼하고 싶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숙자 빨리 죽게 하려고 하느냐고 반대하셨습니다. 양가의 반대와 선생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왕 죽을 바에는 결혼이라도 해보고 죽자는 심정으로 그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혜로, 그리고 현대의학의 힘으로 용혈성 빈혈이라는 변명을 알았고 완치를 받아 좀 늦게나마 박사학위까지 받고 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기나 긴 병마와 싸우는 그 세월 동안에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은 밤을 세워도 다 말씀드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사회자께서 제가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자원봉사 부소장으로 선생님 밑에서 여성인권 문제 등을 위해 활동했다고 저를 소개하셨습니다만, 기실은 선생님께서 제게 베풀어주셨던 그 무한한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명지대학교 법학과 교수로 있으면서도, 대학 측의 양해를 얻어 상담소 자원봉사 부소장으로 교육원을 맡아 각종 법률 강좌는 물론, 이른 바 평생교육, 사회교육을 위해 조그만 봉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가족법 개정운동에 뒤를 이어 여성을 위한 상속세법 개정, 민법상의 재산분할청구권규정 신설 등 각종 법률상의 여성차별 폐지를 위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그 크신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기에는 극히 적은 수고였고 봉사였다고 생각됩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특별히, 옳지 못한 일, 잘못하는 일을 보면 불 같이 야단을 치시는 선생님의 가르치심, 그 책망 이후의 따뜻한 격려의 말씀과 온화한 사랑의 가르치심을 그대로 배우고 익혔습니다. 그래서 25년간의 대학교수를 하는 동안은 물론, 8ㄴㄴ간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현재까지도 교수들에게, 직원들에게, 선생님의 교육법, 훈육법을 그대로 실행해 오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는 저는 선생님의 수제자라고 고백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일을 끝까지 지켜보며 추적하는 실천적, 투쟁적 기징을 본받지 못한 점을 언제나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게 일생 대학교수로 지낼꺼냐, 국회의원을 하고 정치계로 나가라고 권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선생님의 뜻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바로 제 약한 투쟁력 때문입니다. 실은 그 후 다른 정권에서도 국회의원, 장관직 제안이 있었습니다만, 일체 거절하고 정치인은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여·야를 막론하고 제가 중립적 입장에서 잘하는 점, 못하는 점을 과감히 지적하고 비판하는 다소의 정치성향이 있다는 점에서는 선생님을 조금 본 받았습니다.
선생님과 저 사이에 이런 일화가 있었습니다.
저는 언니가 여당 비례대표제 국회의원이 된 것을 조간신문을 보고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저에게 호된 질책을 내리셨습니다. 제 일생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그렇게 호된 질책을 받아 본 적이 없었고 험악한 말도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네가 스파이 노릇했구나. 너의 언니가 여당이고 여당 국회의원이야. 왜 나에게 속이고 내 옆에 있었느냐 하시면서....
그래도 저는 한 마디 변명 없이 묵묵히 서서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저는 선생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저는 선생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또한 김숙자를 속속들이 알고 계셔서 그날 이후 더 이상 말씀을 않으시고 저를 여전히 사랑하셨습니다.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며 이화여대생들을 교문 밖으로 나가자고 독려하던 저의 과거를 아셨던 선생님, 1971년 김대중 대통령 후보 지원유세 차, 부산에 오셨을 때 저희 집으로 모셨던 저의 속내를 아셨던 선생님, 목에 노란색 마후라를 두르고 김대중 선생님 선거유세장을 소문 없이 다닌 것을 알고 계신 선생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제가 자유, 민주, 정의라는 단어들을 극히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법학도임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더욱 제게 공연히 화를 내신 것이라는 것을 저 또한 잘 알기 때문에, 선생인과 저는 그 이후에도 찰떡
 궁합으로 상당 세월을 함께 하였습니다. 제 남편 역시 선생님의 열렬한 팬 이었습니다. 이른 바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후, 정일형 박사님께서 병원에 계셨고 그 입원실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일일이 기록하게 할 때에도, 당시 남편은 판사 신분이었지만 저와 함께 거리낌 없이 입원실 출입을 하였습니다. 저희 부부는 두 분을 존경하고 그 하시는 일들에 전적으로 동감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국회의원, 장관이 있는 여당 집안 내에, 야당 김숙자가 있다는 것, 이건 순전히 선생님 제자로 선생님을 종경하며 선생님께로부터 받은 가르침으로, 선생님을 쫓아다닌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제게 혈육은 혈육이었고, 스승은 스승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선생님의 비밀스러운 면을 또 알려드리려고 랍니다.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완치되고 결혼해서 못 낳을 것이라는 아이 셋을 나았을 때 기뻐하셨지만, 제 건강을 계속 체크 하시던 선생님은, 남편에게 “숙자 죽이려고 셋씩이나 낳고, 아들 낳으려고 또 더 낳으려고 하느냐, 당장 중절 수술하라”고 명하셔서 제 남편은 병원에 가서 아들이 너무 많다고 거짓말하고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저에게 딸만 셋인 것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가끔 “하나가 아들이었으면 좋았는데... 하셨고, 너는 다른 복은 다 있는데 아들 복이 없구나.”, 이러셨습니다. 여러분! 여성운동가 이태영 선생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하고 놀라거나 실망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그 시대의 모든 친정어머님들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친정어머님처럼, 그 만큼 저를 진정 사랑하셨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니, 여러분, 절대 비밀로 해 두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공평하십니다. 제 딸들에게서 아들만 셋이 나왔습니다. 손자만 셋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선생님은 제가 아들이 없다는 염려를 더 이상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실로 선생님은 열정적이고 투쟁적이신 사회운동가 이셨습니다. 그러나 서울 중구 구민들이 배출한 당시 야당의 큰 지도자 8선 국회의원이셨던 남편 정일형 박사님께는 더 없이 사랑스러운 애교 만점의 아내셨습니다.
어떤 때는 제가 닭살이 돋을 정도로 애교 만점이셨습니다. 정대철 전 의원, 정호준 전 의원에게는 더 없이 다정하신 어머니, 할머니셨습니다.
그리고 중구가 낳은 정치인 명가의 여주인으로서, 더 없이 중구 구민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세심한 여성이셨습니다.

제가 선생님 때문에, 선생님의 심사를 받아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닭찜요리의 명인 자격을 취득했다는 말씀도 들려 드리겠습니다.
남편이 부산법원에 발령을 받게 되어 부산에 살고 있을 때, 1971년
김대중 대통령 후보 지원유세 차 선생님께서 부산에 오셨습니다.
선생님을 저희 집에 하룻밤을 모시면서 저는 생선회와 닭찜요리를 주 반찬으로 식사대접을 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서울 가셔서 만나는 분들에게 숙자가 닭찜을 그렇게 맛있게 해주더라, 공부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음식 솜씨가 끝내 주더라고 소문을 내신 덕분으로, 제가 하루 아침에 닭찜 명인으로 등극했습니다. 그 후 저희 집에 오시는 손님 마다 닭찜 요리를 해 달라고 해서 저는 진정 닭찜요리의 대가가 되었습니다.
선생님! 꿈에라도 모실 수 있다면 요즈음 진일보한 퓨전식 닭찜 요리의 진수를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그 유명한 백종원TV스타를 밀어내고 네가 나가 요리강습을 하라고 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제자 자랑이 끝없으신 선생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보면 선생님께는 우리나라 여성문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여성의 인권문제, 우리나라의 자유민주화 뿐만 아니라 세계 각 국의 민주화가 온통 선생님이 짊어지셔야 할 짐이었고 그 모두가 선생님의 근심 꺼리였습니다. 요즈음 정부 정책도 그러하고 대학 마다 글로벌 인재, 창의적 인재, 융 복합 인재양성이 교육목표로 통일 되다시피 되어 있습니다. 이런 요즈음 선생님을 회고해 보면, 이태영 선생님이야 말로 일찍이 글롭ㄹ 지도자, 창의적 지도자셨고, 여성문제, 인권문제, 자유 민주시민운동
등 모든 분야를 두루 섭렵하는 융 복합형의 선각자요, 지도자 이셨습니다. 그리고 일찍이 이 나라에 가정법률상담소를 자력으로 세우시고 경영하신 선생님은 경제적 약자, 법률적 약자를 위해 국민 복지를 개척하시고 실현시키신 선구자였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더 이상 이태영 선생님을 우리나라 여성 지도자, 여성인권운동가 등 “여성” 이라는 앞 글자를 틀에 묶어 거론하지 말 것을 호소합니다. 선생님은 진정 특별한 여성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활동분야는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를 상대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생애의 업적과 기여하신 분야는 여성은 물론, 남성 모두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야 말로 글로벌 인재, 창의적 인재, 융복합의 고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 그리고 여성은 물론 약한 자를 위한 사설 가정법률상담소를 전국적으로 설립하고 운영하신 복지 실천가였습니다.
그 시대를 살아오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그 당시는 여성의 길은 척박한 땅, 돌밭 길 같고 사막 같았습니다. 그런 시대에 여성인권의 목마름을 축여 줄 우물을 파신 분이셨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는 선생님 앞에 “여성” 이라는 단어를 줄 줄 붙여 왔습니다. 여성 인권에 허기지고
배고팠던 시절에 그 허기를 채워 줄 마중물을 마련하신 분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여성 변호사, 여성 운동가, 여성 인권가, 여성 지도자 라는 명칭을 선생님께 바쳤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들어와 돌이켜 볼 때, 선생님은 여성만을 위한 지도자가 아니셨습니다. 전 세계 인류를 위한 선각자 지도자셨습니다. 글로벌 인재, 시대를 앞서간 창의적 인재, 융 복합의 지도자 이셨기 때문에 이제는 굳이 “여성” 두 글자를 앞세워 선생님의 업적을 그 지도력을 그 활동분야를 좁혀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훌륭하신 선생님을 상당기간 모실 수 있었고, 선생님 밑에서 배우고 심부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을 영관으로 알고 감사합니다. 비록 제 키는 여전히 자라지 못하고 이렇게 작은 체구이지만 그 남 대학에서 대학원장, 부총장을 거쳐 오늘 총장까지 자라 온 것은 선생님의 여러 가르침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른을 못살 것이라던 제자 김숙자가 일흔 네 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오늘도 제가 여전히 선생님의 가르침에 목말라 있는 제자입니다. 오늘도 제 질문에 대한 선생님의 답변을 듣고 싶은 제자입니다.
두고 온 고향땅을 그리며 통일을 염원하시던 선생님, 지금 어디서부터 어떻게, 남북관계를 풀어 나가야 할까요? 동·서간의 갈등을 넘어 부모·자식 세대간에, 진보·보수라는 집단간에, 노·사간에, 깊어져가는 골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요? 융합과 화합의 원천을, 그 구심점을 어디에서부터 찾아야 하겠습니까?
선생님! 나의 자유, 너의 자유, 저 마다의 자유들이 그 사승작용으로 인하여, 자유가 차고 넘쳐서 해일이 일어날 지경입니다. 나의 인권, 너의 인권이 부딪치며 조각나서 어느 누구의 인권인가는 낙엽처럽 흩어져 밟힐 수도 있는 지경입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자유, 민주, 정의, 평등, 평화의 의미를 다시 가르쳐주실 수 없으신가요?

선생님의 제자 김숙자가 추모사를 하는 이 자리에서도 여전히 하늘을 향해 선생님께 끝없는 질문을 합니다. 세상 끝 날까지 스승님을 본 받아 법과 원칙에 따라, 정의롭게, 그리고 당당히,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제자가 이 시대에 선생님으로부터 다시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저는 영원한 선생님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추모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