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유공자 정일형 박사 공적서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19-06-26 10:48     조회 :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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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유공자 정일형 박사 공적서"

정일형 박사는 3ㆍ1운동이 일어난 1919년(당시 16세)부터 1945년 (당시 40세)까지 도합 20회 5년에 걸친 영어 생활과(당시만 해도 국내에서는 박사 학위에다. 민족의 높은 신망까지 지닌 분은 2-3명에 불과해서 정 박사의 이용가치를 노린 일제의 간악한 회유정책으로 형무소에 오래동안 수감하지 않고 수없이 체포해 괴롭히기만 하였음) 해방 직후의 건국 운동에 몸바쳐 헌신한 불명의 공훈을 인정한 정부는 유가족측의 극구사양에도 불구하고 사회장으로 국립 묘지의 유공자 묘역에 모심으로써 많은 국민과 뜻있는 참배객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1. 태극기 대량 제작과 3ㆍ1 만세 시위사건
 1919년 3ㆍ1운동 당시 정일형 박사는 광성 고보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 해 2월 20일경부터 동교 기숙사 지하실에서 상급생인 김재호, 주기도, 최봉호. 박명복 등 1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 소형 태극기 5.000여장을 제작하고 선언서, 전단 등을 등사기로 유인하여 거사준비에 현신, 협력하였다.  또한 3월1일 정오부터는 33인 중의 한 분이신 남산현 감리교회 신홍식목사의 지도하에 제작한 태극기와 선언서를 평양시 전역 가가호호에 배달하였고 만세 대모에 앞장서서 이틀간 밤늦게까지 평양 거리를 누볐다.  당시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일제 제 77보병 연대의 출동으로 무차별 총격이 가해지고 시위대 주동자와 함께 정일형 박사도 주동학생으로 평양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1차) 그러나 16세의 어린 나이이고 중학생이라 하여 다.  동지들과 함께 7일 후 훈방되었다. 
2. 독립신문 배포 사건
3ㆍ1 만세사건 후 휴교조치가 내려지자 남포로 내려가서 그곳 덕동교회 최 목사의 부탁으로 상해임시정부에서 발행 국내에 밀반입되는 독립신문을 평양, 진남포 일원 유지들에게 배포하는 일을 도맡았다.  마침내 일경에 이 사건이 발각되어 최 목사 이하 정박사를 포함 백 여명이 용강 경찰서에 수감되었다. (2차) 1개월간의 유치장 생활 이후 '불령선인'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등 요시찰 인물이 되어 일시 풀려났다. 
3. 친일어용 '핫취' 교수 집단 구타 사건
1923년 3월 정일형 박사가 연전 2학년에 재학하고 있을 때 미국인 교수 핫취가 강의도중 '한국을 근대화시키고 발전시키려면 우선 기술, 자본, 원료 그리고 시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여건 가운데 아무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한국으로서는 발전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일본에 의존 할 수밖에 없으므로 한국의 독립은 부당하다. '고 말하는 것을 듣고 민족적 의분을 참지 못하여 이창희, 문장욱, 이은택. 노진. 김경섭, 이현희 등과 합세하여 그를 집단구타. 실신시켰다.  이 사건의 주동자로 정 박사는 퇴학 처분을 받았으나 동창들의 결사 투쟁과 조병옥, 노정일 교수의 노력으로 무기정학이 되었고 계속된 학생. 교수의 반대에 힘입어 1년 정학처분으로 감면 되었다. 
4. 도미 유학시절의 독립운동
정 박사는 1929년 2월 1일 고국을 떠나 도미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조국 광복 투쟁에 불타고 있던 그는 재미 유학생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이훈구 박사를 천거하고 자신은 외교부장 겸 학생회 기관지 '우락키'의 편집책임자가 되었다.  해외 독립운동 단체인 이 조직을 통하여 방학때는 수양회를 개최하고 뉴욕 한인회를 중심으로 해외교포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5. 항일 투쟁 위장 목회 활동과 독립 운동교수로서..
1935년 6월 사회학과 박사과정을 마치고 철학박사 학위(드루대)를 받고 국내 항일활동을 위하여 그 해 11월 말 귀국한 정 박사는 ‘이제 내가 조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앞장서자’라는 일관된 생각의 실천에 들어갔다.
윤치영, 조병옥, 유억겸 씨 등의 환영회에 있어서 이묘묵 연희전문 학감의 모교에서의 사회학 강의를 맡아줄 것을 요청받았지만 많은 애국지사가 변절해 버리는 시대라 민중에게 독립사상과 함께 ‘일제는 반드시 망한다’라는 신념을 심어주기 위하여 평양 신리에 교회를 세워 목회를 통한 항일 독립 투쟁을 펴면서 숭실전문에서 철학 강의도 맡아 민족혼을 불러넣는 등 많은 투쟁과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윤인구, 정경옥, 이항신 씨등 쟁쟁한 기독청년 등이 지도자로 함께 활동하였다.
1937년 10월 경 정일형 박사는 평양지방 감리교 기독청년 연합회 회장으로 민족자각운동에 헌신했고 특히남산현교회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을 연사로 하는 특별 연회를 개최한 일로 일경에 의하여 체포, 투옥되었다.(3차)
이 강연회가 안창호 선생의 마지막 강연회가 되었고, 이 강연회의 주최로 말미암아 정박사는 흥사단 사건에 연루되어 또 다시 투옥되었다.(4차) 
6. 농촌연구 와 신간회
1937년 10월 중순부터 2년간 감리교 신학교에서 교장 변홍규 박사와 함계 교수로 봉직하였다.  정박사의 은사인 '펠튼'박사의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길은 농촌교회의 진흥과 국민 계몽에 있다. "는 지론에 따라 그와함께 "농촌교회 독본"(238p 4X6판, 1940년 4월 15일 발행)을 저술하고 김리교 선교부 초대총무로 활약하면서, 전국 교회 순례를 하며 민족해방의 원동력을 기르고자고 호소했다.  이때 이상재, 김병로, 조병옥 선생 중심이 된 신간회가 조직되었는 바 이분들과 동지적 결합을 맺고 농촌연구와 계몽사업에 힘을 쏟았고 이상재 선생 별세 후의 정박사의 활약은 더욱 더 컸다.  1940년 4월 하순 경 일경은 그들의 앞잡이들을 시켜 신학교 구내에 창씨 개명반대, 총독정치 반대를 주장한 흑색 전단을 뿌리게 하고, 그 죄를 정일형, 변홍규, 장시화, 나사행, 이겸묵, 박건익 등 교수와 학생들에게 뒤집어 씌었다.  그리고는 이들을 서대문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하고(5차), 연일 고문과 악형을 가하였는데, 그 중 정박사는 주모자라 하여 더욱 심하게 다루어 초주검을 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전국 교회와 외국인 선교사의 항의 투쟁에 굴복하여 3개월만에 석방되었지만, 반폐인이 된 상태였고, 그해 10월 경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신학교는 강제 폐교되었다. 
7. 흥사단 수양동우회 사건
1938년 1월 정일형 박사는 소위 흥사단 수양동우회 사건에 관련되었다. 하여 또다시  일경에 의해 구속되었다.  (6차) 미국 유학생임을 빌미로 하여 미국의 간첩이라는 누명도 함께 씌워서 동우회에 대한 억지 자백 고문의 구실로 삼았다.  정박사가 고문으로 사경에 이르자 그들은 정박사를 일시 귀가 시켰으나 그들의 감시는 더욱 극심 했다. 
8. 창씨 개명 반대 운동
조선총독부가 '동조돈근' '내선일체'를 주장하면서 창씨 개명을 강요하고 이에 불응하면 보국대로 징용하고 구류를 시키는 일제의 발악에 항거 정박사를 주축으로한 신학교 중심의 창씨 개병 반대 운동을 전개, 최후까지 민족정기를 수호 하였다. 
9. 영문판 농촌교본 발간사건
일제의 조선 농촌 수탈상을 세계에 폭로한 '펠톤' 박사와의 공저인 '농촌교회독본'의 내용을 문제 삼아 한국 농촌의 참혹한 실정을 조사한 자료를 미국인에게 팔아 먹은 국제스파이로 몰아 또다시  유치장으로 끌려가(7차) 고문과 억지 자백을 강요당하고, '비행기 태우기' '물메기' 등 고문을 당한 끝에 각혈을 하고, 심한 빈혈증세를 일으켜 사경을 헤메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이에 굽히지 않았다. 
10. 일본 교도 헌병대 유치장에서의 투쟁
정일형 박사와 두루대학 동창생인, '송본 탁부'씨가 경성공업전문학교(구연희전문)교장으로 임명되어 정 박사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주었다.  그가 석방되자 반폐인 된 그에게 전지정양의 일본행 여행허가를 받아주었다.  1941년 4월 동경에 도착 발철재 박사, 안호상, 이호빈 씨 등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되자 다시  귀국하기로 결심하고 그 준비를 서둘러 12월 8일 동경을 떠나기로 했는데(그날이 바로 소위 대동아 전쟁이 터진날) 이날 새벽 2시경 정박사의 하숙방을 일본 헌병이 급습하여 헌병대로 끌고 갔다. 8차) 별다른  죄명 없이 한 달간 심한 악형만 가하더니 드디어 '불영선인, 요시찰인' 이란 불명예를 씻고 이제부터라도 대동아 공영권 형성 국책에 협력하라는 것이었다.  또다시 산 송장이 되어버린 정박사는 3명의 일본 헌병에 의하여 서울까지 호송되고 다시  서울의 일본헌병에 의하여 집으로 넘겨졌다.
11. 황민화 정책 및 신사참배 반대운동
1942년 1월 여름까지 병실에 누워 있는 정박사에게 일 헌병은 매일 같이 찾아와 감시 하였고, 사람을 보내어 황민정책에 협력하라고 갖은 회유와 강권 수단을 폈다.  소위 학병과 보국대 징용을 권했고, 내선일체와 성전완수라는 총독부의 구호를 선상하는 선무반이 되어달라는 것이었다.  이를 끝까지 거절하고 나아가 신사참배와 기독교단의 총독부 예속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하여 병상에서 끌려가 다시  평양경찰서 유치장으로 이송 수감되었고(9차) 죄명은 유언비언 날조, 치안유지 위반, 육해군 형법위반이었다.  이때 함께 구속된 사람은 유형기 박사, 양주삼 목사, 문창모, 이규갑 목사, 전효배, 송흥국, 구성서 목사 등 이었고 모두 같은 죄명으로 8개월의 체형을 언도 받았다.  이때 평양경찰서에서의 갖은 악형, 고문, 위협, 회유는 몇 달을 두고 계속된 형벌 이상의 형벌이었다.  1년후인 1943년 여름 유형기 박사에 뒤이어 정박사는 아내의 노력으로 병보석이 허가되어 기독병원(원장 김명선 박사)에서 치료를 받았다.  1944년 봄 제1심 공판에서 징역 1년이 선고 되었고, 그때의 제판관은 가내야마라는 해방 후의 김모 대법관이었고, 변호사는 조만식 선생의 서랑 정씨, 김준평 변호사가 맡았다.  그 후 1944년 9월 제 2심의 계류중 특별대리인 고황경 박사와 학계, 교계의 진정으로 가석방되었다.
12. 투옥의 항일운동사
이상 11개항 공적 외에도 도합 20여회에 걸쳐 경찰, 헌병대 및 형무소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사실은 이 나라의 교육계, 종교계, 정계의 생존 지도자가 다. 알고 있고, 후대에도 빛나는 항일운동 이였다.  정일형박사는 일제하에서 도합 20회 5년에 걸친 투옥생활을 통한 항일독립투쟁 끝에 조국의 해방을 맞았다.
13. 특별공적 - 해방 후 미군정 철폐 투쟁
특히 정박사는 미군정의 철폐와 동포의 보호를 목적으로 일시 미군정고위관직에 있으면서도, 당시 '미군정입법의원' 증언대에 서기를 자청, 장시간에 걸친 '미군정즉시철폐'와 한국정부즉시수립'을 주장, 당시 전국민을 놀라게 한 투사이며, 정부수립을 앞당기신 공로자임을 오늘의 생존원로들께서 모두 알고 계시며 후대에서 알려야 하는 사실이다. 
이상은 정일형 박사가 국가유공자(독립운동 부분만) 취득하기 위한 공적서를 정리해서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