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삶 자체가 민주화 역사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09-08-24 10:39     조회 : 12069    
DJ 삶 자체가 민주화 역사 
 
 
◆ DJ시대를 다시본다 ② ◆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인생 역정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정부 수립 이후 계속된 혼돈과 갈등, 반독재 투쟁의 현장 한가운데 김 전 대통령이 있었다. 특히 `인동초(忍冬草)`라는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민주주의를 위한 그의 헌신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DJ가 처음 출마한 선거는 1954년 민의원선거.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패배의 쓴잔을 마셔야 했다. DJ는 1956년 장면 박사의 권유로 민주당에 입당했다. 그는 1961년 5월 14일 인제에서 치러진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하지만 당선의 기쁨은 잠시였다. 불과 이틀 뒤 5ㆍ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 국회가 해산돼 국회의사당에 발을 들여보지도 못했다. 독재와의 기막힌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 목숨 걸고 싸운 반독재 투쟁

=1971년 4월 치러진 대선 출마는 정치 인생의 변곡점이자 본격적인 민주투사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됐다.

동교동 집 대문에 폭탄이 투척되고, 대통령 선거 사무장이었던 정일형 박사의 집이 전소되는 미스터리한 사건의 연속 속에 유세를 다녔지만 94만7000여 표 차로 떨어지고 말았다. 당시 일본 아사히신문은 `무효표와 부정표 속출`이라고 보도했다.

그해 5월 8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 지원을 다니던 그는 선거 하루 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다. 대형 트럭이 DJ가 탄 차로 돌진했던 것. 이 사고로 고관절을 다친 그는 평생 지팡이를 짚어야 걸을 수 있는 장애인이 됐다. 6ㆍ25전쟁 때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던 DJ가 맞은 세 번째 생환이자 민주 투쟁을 위한 육신의 고통의 시작이었다.

1972년 10월 신병 치료차 일본에 머물던 DJ는 유신헌법이 통과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때부터 그는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반독재 정치활동을 펼친다. `민주주의 활동`에 대한 대가로 그는 1973년 8월 8일 또 한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다. 일본 도쿄에서 납치를 당해 바다 한복판의 배 위에 던져져 수장 당할 뻔했던 것이다. 129시간 만에 극적으로 생환했다.

1976년 3월 서울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3ㆍ1 민주 구국선언`으로 DJ는 다시 징역형을 살게 된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3ㆍ1절 기념 미사 행사에서 `민주 구국선언`을 발표해 청중을 선동하고 시위를 촉발해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며 관련자 20명을 악명 높았던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1978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의 대사면 조치로 DJ는 석방됐다. 구속된 지 2년9개월 만이었다.

◆ 5ㆍ18로 또 한 번 죽을 고비 넘겨

="이 나라에 민주주의만 꽃피울 수 있다면, 우리 국민에게 자유와 정의가 회복돼서 또다시 눈물과 한숨과 비통한 생활만 없다면 나는 무엇이 되건 상관없습니다."

DJ가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짧은 자유를 누리는 동안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이 땅에 민주주의와 자유ㆍ정의는 빨리 오지 않았다.

1980년 짧았던 민주화의 열망 `서울의 봄`이 신군부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5ㆍ18 당시 광주에 없었던 DJ는 5ㆍ18 때문에 또 한 번 죽을 고비를 맞는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끄는 신군부는 비상계엄조치를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동시에 전국의 민주화 운동가들을 체포했다. 다음날인 5월 18일 이에 항의하는 광주 시민들이 5ㆍ18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한 신군부는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5ㆍ18 주동자로 DJ를 지목했다. 내란혐의로 기소된 DJ는 1981년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외국 정부가 사형을 중단하라는 압력을 넣었고,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에 이어 20년형으로 감형했다. 이로써 그는 민주화를 위해 다섯 번째 죽을 고비를 넘긴 셈이었다.

◆ 끝내 민주화를 이루다

=1982년 12월 2년7개월의 옥고 끝에 형 집행정지로 미국에 망명했다. 그는 미국 체류 중 국내에 있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했다.

1985년 2월 8일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죄인의 신분이었다.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 18여년1개월의 잔여 형기를 남겨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그의 정치활동을 허용하지 않았다. DJ 귀국은 며칠 뒤 있었던 `2ㆍ12`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 돌풍이 부는 데 큰 힘이 됐다.

국민의 정치적 변화 열망에 밀린 군사정권은 3월 초 DJ와 YS의 전면 해금 조치를 단행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힘을 합쳐 반독재 투쟁의 전면에 선다. 온 국민의 민주화 열망이 점점 달아오르더니 결국 1987년 6월 항쟁으로 군사정권의 양보를 얻어내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다.

그 후 두 번의 대선에서 낙선을 거듭하다가 결국 1997년 대선에서 한국 정치 사상 첫 정권 교체를 이루게 된다. 오랫동안 뿌려놓은 민주주의의 씨앗이 열매를 맺은 셈이다.

◆ 리콴유와 민주주의 논쟁 ◆

`DJ와 민주주의`를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외국인이 한 명 있다. 다름 아닌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다. 그는 1959년부터 1990년까지 31년간 싱가포르를 이끌었다. `존재할 수 없는` 나라를 아시아 최고의 선진국으로 이끌었지만 정치만은 권위주의를 유지한 인물이다. 싱가포르 현 총리(리셴룽)는 그의 장남이다.

DJ와 리콴유는 1994년 `아시아적 가치`를 논하며 한판 붙었다.

리콴유가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문화는 숙명이다`고 주장하자 DJ가 당시 아태평화재단 이사장 자격으로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에 `문화는 숙명인가`라는 글을 실으면서 촉발됐다. 리 전 총리는 "아시아적 사회는 서구적 사회와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서구식 민주주의가 동아시아에 부적합하다는 점을 암시한 것이다. 반면 DJ는 "과거 아시아에서도 서구와 같은 민주 이념이 존재했다"며 리콴유의 주장을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그는 영국의 정치철학자 존 로크보다 거의 2000년 앞서 중국의 철학자 맹자는 `왕이 악정을 하면 국민은 하늘의 이름으로 봉기해 왕을 권좌에서 몰아낼 권리가 있다`고 한 점, 한국의 토착 사상인 동학이 `인간이 곧 하늘이다`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고 가르친 점을 예로 들었다. 그는 "가장 큰 장애는 문화적 전통이 아니라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의 저항"이라면서 리콴유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리 전 총리는 1999년 펴낸 자서전에서 DJ에 대해 "위기를 겪는 과정에서 그늘이 진 사람"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DJ는 2000년 12월 10일 노벨평화상 시상식장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을 드러낸다. 또 "정의로운 삶을 산 사람은 당대에 비참하더라도 역사 속에서 승자가 된다"는 말을 남겼다.

09.08.24 [조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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