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
 |
|
제2차 세계대전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 압제 밑에 시달린 대한민국은 해방과 함께 복잡 다난한 국제 정세의 흐름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의 해방은 사실 연합국의 승리가 가져다 준 선물이었고, 따라서 어쩔 수 없이 냉전의 상흔으로서 38선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정일형박사는 종교교육과 사회학을 전공하였던 탓으로 세계 평화에 관한 문제에 각별히 비상한 관심을 가졌고, 틈틈이 유엔에 관한 글과 저서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 후 정일형 박사는 유엔총회 한국대표단 고문으로 파견되었는데 그 임무는 UN의 감시하에 5.10 선거를 치러 정부를 수립한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독립국가로서의 승인을 받는 것이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48년 12월12일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이 이루어졌고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정일형박사는 계속해서 구미지역파견 친선사절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1949년 유엔한국협회 회장에 취임하여 1960년까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최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
|
정일형 박사는 1950년 대한민국 정치일번지인 서울 중구 선거구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1971년 제9대 국회의원까지 계속 당선되어 8선의원이 되었다.
그 기간 중 1950년 2대 국회외무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6.25 전쟁 발발 후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한통신사를 창립, 사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대한통신은 UP 통신과 특별계약을 맺고 있어 매우 중요한 언론 기관이었는데 이승만정권은 자신들의 정권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탄압을 가하기도 하였다.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정일형 박사는 국회의원 재선에 당선되었고, 민주헌정을 바로잡고 실향민의 절대 염원인 남북통일을 향하여 용진해 나갈 것을 공약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정권은 사사오입이라는 대한민국 헌정사에 더 없이 해괴한 논리를 대며 이대통령의 종신집권을 꾀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부산 정치파동에 이어 54년 11·29의 이른바 사사 오입 개헌 파동은 대한민국 헌정사에 하나의 큰 오점이었고, 동시에 쓰라린 치욕이었다. 법을 무시한 것은 물론이고, 상식마저 묵살해버린 전대미문의 횡포였는데 이러한 집권자의 독단을 방관할 수 없어서 정일형박사를 비롯한 뜻있는 지사들이 호헌준법의 기치를 들고 ‘호헌 동지회’를 결성하였다. 호헌 동지회는 민주 헌정의 기본원리가 이 땅에서도 실현되길 갈망하는 국민들의 열망을 담은 신당발기를 위한 초석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온갖 장애와 난관을 물리치고 ‘민주수호’의 역사적 사명을 띤 민주당을 창당하게 되었다. 민주당은 내각 책임제로 구김살 없는 민주주의를 구현하겠다는 민주 이념과 관료 독재를 배격하여 정치 질서의 혁신을 이룩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정일형박사는 언론탄압 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자유당 정권의 나치즘적 언론 정책을 비판하고 이를 바로잡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1956년 이후 당시 야당인 민주당에 속하여 외교부장을 지냈으며, 4.19 혁명 후 민주당 내각에서는 외무부장관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의 유엔가입, 국토통일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961년 필리핀 아담슨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가장 민주적인 체제와 제도로 민주적 방식에 의해 자라나던 제2공화국은 극히 치욕스런 군사 쿠데타로 무너지는 일이 발생했고, 5.16으로 정권을 빼앗긴 뒤 정일형박사는 정정법-정치정화법(政淨法)에 묶여 연금생활을 당했다.
이후 1963년 정정법에서 풀리고 5선 국회의원에 당선되서야 다시 국회로 나갈 수 있었다. 당시 박정희군사정권은 한일국교 정상화문제를 정권 유지책의 일환으로 졸속 처리하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상황이었는데, 정박사는 제2공화국의 외무장관으로서 한·일 신통상협정의 체결을 위해 노력하면서 대한민국이 크게 유리한 입장으로 타결의 가능성을 열었던 장본인이었기에 박정희정권의 한일 회담의 내용과 조건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고, ‘대일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 반대투쟁에 나섰다.
한일 협상에 대한 학생들의 반대 투쟁은 6월3일 정점으로 올라왔고, 정일형 박사는 대정부질문을 통해 박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에 관한 굴욕적이고 불평등한 조약의 비준에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66년 의원직을 사퇴한 의원들과 함께 신한당을 창당하였고, 정일형박사는 신한당 고문을 지냈다. 이후 공화당에 맞서 통일적인 투쟁을 벌이고자 민중 · 신한 양당이 통합, 신민당을 발족시켰고, 정박사는 신민당 후보로 중구에서 당선, 6선의원이 되면서 신민당 부총재로 피선되었다. 또한 1969년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활약하였고, 그 해 국토통일원 고문에 추대되었다.
1969년 10년 만에 다시 나타난 독재의 망령을 둘러싸고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박정희정권이 독재정권의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69년 9월9일 3선 개헌안이 본회의에 상정되었고, 정일형 박사는 전국 유세와 국회에서의 발언을 통해 3선 개헌을 가열차게 반대하였다.
1971년에는 신민당선거대책본부장으로 당시 신민당 대통령후보 김대중의 선거사무장을 맡았다. 1974년 신민당 고문에 추대되고, 이듬해 통일연구협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3선 개헌은 통과되었고, 정일형박사는 1976년 3월 유신정치에 반대하는 이른바 ‘3.1명동사건-민주 구국선언’ 에 연루되어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1977년 3월22일 국회의원직 박탈 이틀 후인 24일 정일형박사는 국회에서 고별인사를 마지막으로 8선의 의정활동을 마무리지었다. 이 날 신민당 서울특별시 제1지구당인 종로·중구의 확대간부회의는 주사회를 위하여 끝없이 투쟁할 각오를 거듭천명하였으며, 신민당 소속의 국회의원 일동이 그간의 정박사의 뜻을 기리는 헌시를 담은 기념패를 전달하였다.
|
|
 |
|
대한민국 헌정회 |
|
활 동 년 도 |
소 속 |
전 임 |
후 임 |
제2대 (1950.5.31~1954.5.30) |
■국 회의원(중구 을)
■ 무소속
■ 중구 갑 : 원세훈 |
윤치영(중구) |
윤치영(중구 갑)
정일형(중구 을) |
제3대(1954.5.31~1958.5.30) |
■ 국회의원(중구 을)
■ 무소속
■ 중구 갑 : 윤치영
|
원세훈(중구 갑)
정일형(중구 을) |
주요한(중구 갑)
정일형(중구 을) |
제4대 (1958.2.31~1960.7.28) |
■ 민의원(중구 을)
■ 민주당
■ 중구 갑 : 주요한 |
윤치영(중구 갑)
정일형(중구 을) |
주요한(중구 갑)
정일형(중구 을) |
제5대 (1960.7.29~1961.5.16) |
■ 민의원(중구 을)
■ 민주당
■ 중구 갑 : 주요한 |
주요한(중구 갑)
정일형(중구 을) |
정일형(중구) |
제6대 (1960.8.23~1961.5.20) |
■ 외무부장관 |
허정 |
김홍일 |
제6대 (1963.12.17~1967.6.30) |
■ 국회의원(서울 중구)
■ 민주당 |
주요한(중구 갑)
정일형(중구 을) |
정일형 |
제7대 (1967.7.1~1971.6.30) |
■ 국회의원(서울 중구
■ 민주당 |
정일형 |
정일형 |
제8대 (1971.7.1~1972.10.17) |
■ 국회의원(서울 중구)
■ 신민당 |
정일형
|
장기영
정일형(종로구·중구) |
제9대 (1973.3.12~1979.3.11) |
■ 국회의원(종로구 중구)
■ 신민당
■ 장기영 |
권중돈(종로구)
정일형(중구) |
민관식
정대철(종로구·중구) |
|
|
|
|
|
 |
|